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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로 Oct 01. 2020

32년생 할머니는 나중에 뭘로 태어나고 싶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눈도 못 뜰 때부터 우리 할머니는 나와 함께 있었다. 바쁜 엄마보다 할머니 밥을 많이 먹고 자라 스무 살 때 고 어린것이 혼자 떠나 사니 나는 할머니에게 매우 아픈 손가락이었다. 바빠서 본가에 잘 못 내려가면서도 꾸역꾸역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는 것은 다 할머니를 보기 위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할머니, 엄마, 나와 6살 터울 여동생은 도란도란 앉아 담소를 나누며 전을 부쳤다. 예전부터 대식구의 식사를 준비하던 우리 할머니는 지금도 전을 한 번 부치면 밥상만 한 소쿠리에 한가득 전을 부치는 것을 좋아하셨다. 서울에 두고 온 고양이의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다음 생애에는 부잣집의 사랑받는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내게 왜 하필 고양이냐고 물으셨다. '고양이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라고 대답하자 '내 강아지 많이 힘들구나'하며 한숨을 쉬셨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여동생과 엄마의 순서로 흘러갔다.


"나는 다음에 태어나면 부잣집에 잘생긴 남자로 태어날래!"

"엄마는?"

"엄마는 크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예전에 한 번 우리 엄마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료봉사를 하며 살고 싶다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며 양말 한 켤레 아깝다고 기워 신으시던 엄마의 입에서 당연하게 부잣집 딸내미 뭐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럼 할머니는?"

"지금 생도 아직 안 끝났는데 뭣하러 다음 생을 생각하고 있냐."

"그래도 빨리 생각해봐."


할머니는 옆에서 내가 갓 부친 고추전을 몇 개 먹기 좋게 가위로 잘라다가 내 입에 넣어주시면 말했다.


"할머니는 다음 생애에는 공부도 많이 하고, 하고 싶은 것도 다 해보고 그냥 그러면서 살아보고 싶다."


1932년 붉은빛 노을 지는 가을에 태어나 열네 살 되던 해야 광복이 되고, 19살 되던 해에는 6·25 전쟁이 일어났다. 가족들 손을 붙잡고 밤에 산을 넘다가 비행기 소리가 나면 풀숲으로 숨으셨다고 했다. 그러면 하늘에선 비처럼 탄피가 후드득 쏟아졌다고 했다. 그런 시대였으니 여성으로 태어나 공부는커녕 먹고살기 바쁘셨다. 가부장적인 할아버지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셨다. 할아버지는 양복이 헤져 자신의 새 양복은 사 입어도 집 안에 쌀이 다 떨어진 건 모르셨다고 했다.


자신의 탄생보다 이제는 죽음이 더 가까워진 나이, 우리 할머니는 다음 생애에 돈이나 지휘, 명예보다는 자신이 살면서 해보지 못한 것을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공부를 많이 많이 해보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돈을 버는 사람이 하고 싶다고. 고작 서른 남짓 살아본 나는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아직 몰라 무엇이 아쉬운지도 모르는데, 우리 할머니는 그 세월을 살아보니 무엇이 아쉬운지 명확하신가 보다.


결국 이 이야기는 할머니가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많이 많이 버는 부자가 돼서 고양이가 된 사랑스러운 나를 키우고, 내 여동생은 부자가 된 할머니의 아들로 태어나기로 마무리지었다. 어쩌면 나는 다음 생에 사랑받는 고양이가 되고 싶은 건 그동안 사랑이라고 불리기 어려운 경험들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구겨진 종이처럼 차마 추억을 펼치기 어려운 그 사랑들 말고, 우리 할머니가 내게 주는 그런 깊은 사랑. 그런 진짜 사랑. 그것이 받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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