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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이로 Oct 06. 2020

다음 생애에는 엄마 딸 안 할 거야

미쁜 편지 # 6



엄마, 나 말이야. 다음 생애에는 엄마 딸 안 하려고. 되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엄마 딸로 안 태어나기로 결심했어. 물론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다음 생에는 엄마 딸로 안 태어날 거야.


어렸을 때는 차라리 엄마가 도망갔으면 했어. 아빠 때문에 힘들던 그때 말이야. 어린 동생과 나를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훨씬 힘이 센 아빠와 힘겨루기를 하면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엄마를 보면서 그냥 엄마가 도망가버렸으면 했어. 근데 스무 살 때 말이야, 위궤양 때문에 처음 수면마취를 하고 내시경을 받던 날에 엄마가 나를 두고 도망가는 꿈을 꿨어. 길도 보이지 않는 엄청 어두운 곳에서 나는 5살의 모습을 하고 울면서 엄마를 따라갔어. 엄마, 가지 마. 가지 마. 근데 엄마가 뒤도 안 돌아보고 나를 두고 가버렸어. 깨고 나니 얼굴이 눈물범벅이더라고. 간호사들이 걱정해줄 정도였어.


이상하게 내 어릴 적 기억에 엄마는 많이 없더라. 그때는 그게 못내 아쉬웠는데 내가 내 밥벌이를 하다 보니 엄마도 먹고살기 바빠서 그 어린것을 두고 일터에 나갔겠구나 싶더라고. 할머니 밥을 더 많이 먹고 자라서인지 이제는 엄마 밥을 먹으면서도 아직 기분이 묘해. 나는 엄마가 요리를 잘 못하는 줄 알았어.


나 사실 엄마랑 아빠 원망 많이 했어. 내가 이렇게 생활도, 마음도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건 다 엄마 아빠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죄책감이 뭔지 차마 밉다는 말이 잘 안 나왔어. 할머니가 통화하다 우시며 그러시더라고. 차라리 부모님 밉다고 얘기하라고. 차라리 미워하라고. 근데도 이상하게 그 말이 잘 안 나왔어. 그 말을 하면 진짜 엄마 가슴에 내가 대못을 수십 개를 박는 일이 될까 봐, 그런다고 차라리 내 속이 시원하면 모르겠는데 그 말을 들은 엄마 표정이 자꾸 상상이 돼서 말을 못 했어. 근데 되게 미웠어.


원치 않는 임신으로 태어난 나를 엄마가 미워할까 봐 걱정도 많이 했어. 나 때문에 이 불행들이 시작됐다고 생각할까 봐 무서웠어. 아니, 엄마는 하지 않은 그 말을 내가 내 스스로에게 했어. 너 때문에 엄마가 힘든 거야 하고 나 스스로를 괴롭혔어.


그래서 엄마, 다음 생에는 나 엄마 딸 안 하고 엄마한테 사랑받는 고양이로 태어날래. 내가 고양이를 키워보니 그렇더라고. 사람들은 무수한 말로 나를 찔러대는데, 유일하게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기를 나눠주는 존재더라고. 엄마가 살아오느라 입 꾹 다물고 참아왔던 말들 내가 다 들어주고 싶어. 엄마가 내게 험한 말로 다른 사람 욕을 해도 나는 모른 척 들어줄게. 잘 때는 외롭지 않게 엄마 옆구리에 붙어서 자고, 엄마가 출근하기 전엔 내가 가만히 깨워줄게. 엄마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발소리를 기억하고 있다가 문을 열기 전 현관문 앞에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마중할게. 그럼 엄마는 내게 잘 다녀왔다고 주름진 미소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줘요.


대신에 나를 지금 생애만큼 많이 사랑해줘. 지금 못한 애정 표현들을 그때의 나에게는 많이 해줘요. 내게 가끔 닭가슴살을 삶아서 입에 넣어주고, 예쁜 리본이 달린 목걸이를 해줘. 발톱이 길어 귀에 상처를 낼 때면 까먹지 말고 잘라주고 재밌는 장난감을 많이 사줘요. 그럼 나는 착한 고양이가 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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