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영부영 살고 있다. 대충 살려고 노력하는데 대충 사는 것도 힘들다.
우울증이 극심한 시기엔 삶에 아무런 기대가 없다. 사실 내가 병원을 다시 찾기 전에 조금 겁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상태가 좋아지는 거였다. 상태가 좋아지면 기대가 생길 테고 기대가 생기면 더 잘 살고 싶어질 텐데, 더 이상 기대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돌이켜보면 늘 기대가 문제였던 것 같다. 너무 많이 기대했고 그래서 자주 슬펐다. 원인을 나나 상대한테서 찾았는데 오류가 많았다. 내 탓이라고 생각했던 게 남 탓이기도 했고 남 탓이라고 생각했던 게 내 탓이기도 했다. 진실은 그 두 개가 섞여 있을 때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은 자책하는 걸 보고 안타까워하면서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에 (적어도 내 경우에) 그건 오해다. 이타적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냥 그게 편해서다. 습관이 된 거다. 남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관계를 끝내거나 결단을 내리거나 싸우거나 아무튼 돌파를 해야 할 텐데 그게 싫으니까 그냥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점점 더 안 먹었다. 끼니를 챙기는 게 귀찮고, 내가 뭐 먹을 자격이 있나 싶었다. 슬퍼서 울었다. 이유 없이 슬퍼서 울었던 적도 있다. 원래 잘 우는 편이 아닌데도 자기 전에 울다가 자기도 했다. 아주 민감해서 누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굴었다. 사과할 일에 사과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서 사과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걸 깨닫거나 사과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도 사과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딱히 우울증이라고는 생각 안 했다.
우울증 진단을 받은 건 20살 때였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병원에 갔다. 약을 먹으면 확실히 상태가 호전된 게 느껴지긴 했는데, 문제는 내가 임의로 병원에 안 간다는 것이었다. 상태가 좋아졌다 싶으면 어라 정병이 혼자서 나았네! 하고 안 갔다. 그리고 꼭 몇 달 지나서 내 발로 병원에 갔다. 당연히 상태는 이전보다 악화된 후였다.
정병러는 자기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다. 그래서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야 한다. 나는 우울증과 불안증 두 개를 진단받았는데, 비질환자들도 이 정도는 인생이 힘들지 않나? 생각했다. 근데 다시 병원을 다니며 약을 먹고 있는 지금은 훨씬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전에는 항불안제를 먹고 잠든다. 집에 가서 약을 먹고 푹 자자는 마음으로도 하루가 버텨진다.
늘 이것보다 상태가 나빠지겠어? 하는 마음이 있는데, 언제나 상태는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제 나는 슬프거나 편안하거나 어떤 상태든간에 그냥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근데 이것도 사실 약을 먹어서 가능해진 것 같다.
어쩌면 우울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왜곡된 렌즈로 세계를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건 왜곡된 렌즈라는 걸 병증이 심할 땐 모른다는 것이다.
이번에 병원을 다시 다니면서 선생님한테 약의 효과를 다시 물어봤는데, 특정 약의 효과를 물어본 것이지만 하여간에 이런 답을 해주셨다. 약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진 않지만 덜 예민하고 덜 화나고 덜 슬프게 만든다. 어쩌면 정석인데도 왠지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확실히 약을 다시 먹으니까 안 먹었던 시기보다 훨씬 살만하다. 사는 게 행복해! 까진 아니더라도 남들은 이런 감각으로 사는구나 싶다. 앞이 미세먼지 심한 것처럼 자욱했었는데, 미세먼지가 '아주 나쁨'에서 '보통' 정도가 된 느낌이랄까?
나는 여전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또 지금 상태가 어떤지 기민하게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거부당하는 걸 어려워하는 것도 똑같다. 그렇지만 분명 더 좋아졌다. 이제는 집에 돌아가서 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나면 기분이 훨씬 좋아질 거란 걸 안다. 그래서 오늘도 술에 진탕 취해서 집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항불안제를 잘 챙겨먹고 잠들기를 선택한다.
약에 의존하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다. 진짜로 두려운 건 의존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이다.
나는 의존할 수 있는 걸 잘 붙들고, 잘 살아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