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블로깅 하려고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다가 하지 못한 내 인생에 대한 글을 담담하게 써 보려고 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낙서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런 재능(?)을 부모님께서 아셨는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미술학원에 보내셨다.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었다. 특히 대전엑스포의 꿈돌이를 그리는 걸 즐기는 평범한 아이였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부모님께 미대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바로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하셨다. 그 후 미술 선생님 소개로 미술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장학제도를 이용해서 미술학원 비용은 절반 정도 부담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시미술은 석고소묘 반, 인물 수채화를 준비했다. 내가 세운 목표가 아닌 미술학원 원장님이 세워준 목표는 XX대 '회화과'. 하지만 입시 미술은 나에게 적성이 아니었고 실력은 잘 늘지 않았다. 성적도 빠른 속도로 낮아졌다. 2002년, 입시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시험을 본 4개 학교 모두 떨어졌다. 특히 XX대 회화과는 예비 13번. 몇 명 뽑지 않는 과 특성상 붙는 걸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지방에 있는 OO대 디자인학부도 말도 안 되는 예비였다. (아마 100번대 였던 것 같다.)
'재수를 준비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OO대 디자인학부 입학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재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모님께서 너무 좋아하셔서 차마 재수를 하겠다는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적성에 맞는 학과가 디자인학부였다는 사실도 몰랐었다. 디자인학부가 뭘 가르치는지도 몰랐다. 지금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XX대 회화과를 갔다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다.
학교에 입학하는 나의 마음가짐은 남달랐다. (물론 그 당시의 치기였겠지만...) '내가 이 학교에 입학한 건 아까운 일이다. 이 학부에서만큼은 최고가 되어야겠다. 그래야 서울의 잘 나가는 학교 학생들과 조금이라도 경쟁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이후부터 과제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또한 장학금을 타서 가족의 비용 부담을 덜겠다는 목표도 있었다. 다행히도 과제는 재미가 있었고, 덕분에 몰입할 수 있었다.
2003년, 나는 친구 따라 군대에 가게 되었다. 2005년 군기가 들어있는 상태로 수업을 더 미친 듯이 듣기 시작했다. 2006년, 나는 이상선 선생님의 웹 사이트 디자인 수업을 듣게 된다. 2005년도에 들었던 웹사이트 디자인 수업의 학점이 별로 좋지 않았던 터라, 나는 학점을 더 잘 받으려는 요양으로 '정말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수업 결과물도 좋았고, 덕분에 이상선 선생님께서 눈여겨보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선생님으로부터 UX(User eXperience) 디자인 쪽 대학원 제의를 받았고, 고민 끝에 OO대 대학원에 가게 된다.
대학원에서 선생님께 받은 교육은 자율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이었다. UX 관련된 책도 많이 읽고, 관련 세미나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글쓰기 훈련, 발표 훈련 등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주로 IPTV VOD솔루션을 만드는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면서 실무 하시는 분들을 옆에서 지켜봤던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이제는 다들 블로깅을 해야 한다고 하시며, 수업 과제물을 블로깅하라고 지도하셨다. 논문을 마치고 이제 인턴 생활을 마쳐야 하는 어느 날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 정말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 뭔가 뭉클했다. 대학원 선배였던 김원규 선배는 시도해 보지도 않고 안된다고만 하는 나에게 '시도'의 참된 뜻을 알려주셨다. 커피의 즐거움도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어느 날 회사 근처의 분식집에서 식사를 하던 중 교수님이 한 말 씀 하셨다. 대학원 입학 때부터 나를 pxd에 보내고 싶으셨다고 하셨다. pxd 면접을 한번 보라고... 그리고 장문의 추천서를 써 주셨다. 추천서는 A4용지 한 장 이상의 분량으로 나의 장점과 단점이 구구절절이 적혀있었다. 혹시 이것 관련해서 질문이 나올 수 있으니 봐 두라고 하셨다. 이 일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pxd에 입사하고 (누구나 그렇겠지만) 6개월간의 수습기간 동안 정말 열심히 다녔다. pxd의 구성원들은 누구나 훌륭하지만 특히 송영일 책임님과, 김금룡 책임과 셋이 같이 프로젝트했던 건 잊을 수가 없다. 그룹웨어 관련 pad UI 제안을 셋이 하게 되었다. 시간이 없어서 하루 만에 컨셉이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생각을 확장시켜줄 수 있는 pad 관련 화면들을 쭈욱 리서치해서 왔고, 셋이 카페에 가서 신나게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그래서 나온 컨셉이 요즘은 많이 보편화된 좌, 우로 메뉴가 확장되는 방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 만에 했던 것치곤 시너지가 엄청났었다.
송영일 책임님은 일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인생과 목표에 대해서도 열정적으로 알려주셨다. 어떤 프로젝트를 하던, 누구와 일을 하던 '진심'을 가지고 하라는 조언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김금룡 책임은 비록 당시에는 의견 충돌이 많았지만, 특유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막혀있던 생각을 확장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김동후 책임님은 특유의 우직함과 성실함으로 스탠다드한 리더의 모습이 이럴 수 있다는 걸 보여주셨다. 또한 내 단점을 극복할 수 있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김선기 책임님 또한 "저라면 이랬을 것 같아요." 화법으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순간마다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료이다.
내가 이상선 선생님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내가 UX를 접할 수 있었을까? 대학원에서 UX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을까? (참고로 이상선 선생님은 CD롬 타이틀 때부터 UX를 시작하신 UX 1세대시다.) 블로깅을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었을까? 또한 내가 pxd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훌륭한 동료들과 같이 일할 수 있었을까?
나는 행복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글은 2013년도 페이스북에 썼습니다. 글의 내용은 유지한 채 최소한으로 문장을 다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