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보여주는 능력’이 디자이너(d)의 전부였다. 선명함은 실력의 이름이었고, 완성도는 출근카드처럼 심장을 두드렸다. 밤새 모니터 앞에서 픽셀 하나의 날카로움을 맞추며, 그 작은 선명함 속에 내 커리어의 자존감을 함께 정렬해 두었다.
그 시절의 나는 보는 능력이 곧 생존이라고 믿었고, 세상을 이기는 방식은 ‘더 잘 보여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내 시야는 흐릿해지고, 대신 세상이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건, 흐려진 것은 내 눈인데 지나치게 또렷해진 것은 세상의 요구였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물이 겹쳐 보이고, 작은 글자를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뜨는 습관이 생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AI는 초고해상도의 이미지를 한 번에 뿜어내고, 3D 질감과 빛의 조도를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계산한다. 나는 흐릿해지고 세상은 더 뚜렷해졌다는 이 기묘한 역설 앞에서, 한동안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젊을 때의 나는 정교함을 무기 삼아 버텼다. 하지만 오늘날 정교함은 더 이상 인간의 특권이 아니다. AI는 필요할 때마다 ‘나보다 빠르고, 나보다 더 정확한 버전’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었다. 시각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실은 그 시대의 요구만 더 더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이미지 하나뿐 아니라 수십 장의 이미지가 즉석에서 쏟아지고, 완성도 높은 레이아웃이 자동으로 생성된다. 예전에는 열흘 걸리던 ‘그럴싸한 시안’이 이제는 몇 초면 만들어진다. 보는 능력은 줄어가는데 보여줘야 하는 수준은 계속 높아진 채, 나는 그 폭주하는 요구 사이에서 조용히 뒤처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