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d/D)에게 언어는 굉장히 중요한 도구이자 무기다. 보통 이 부분을 간과하곤 한다. 시각디자인 학부 1학년생으로 내가 배운 몇 가지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설정한다’는 개념이었다.
당시엔 당연하다듯이 컨셉을 잡는다는 식의 표현을 썼다. 그 결과 컨셉을 잡기 위해 고정값을 찾는 것에 매진하게 된다. 즉, 한 번 컨셉을 잡아 선언했으면 바꾸면 안 되는, 그것도 디자인의 잠정적 결과 형태라면 더욱이 그러했다. 교수님께서 일침을 가하셨다. 컨셉은 ‘설정’하는 것이란 것을.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이것은 그 가르침을 나누고자 책에 담은 내 나름 감사의 표현이기도 했다.
언급했듯이 ‘설정한다’는 개념을 결과가 아니라 상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설정이란 확정이나 종착점이 아니라 잠정적인 기준을 세우는 행위에 가깝다. 멘토링을 하다 보면 전반으로, 진로든 직무든 한 번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과거 내가 컨셉을 대하던 모습과 오버랩된다.
실제 경험적으로도 전공, 첫 직장, 대학원 선택 등은 모두 그 시점엔 대단한 선택을 한다 여겨지지만, 사실상 설정일 뿐 이후 경험에 따라 계속 수정되고 재정의된다는 흐름이 일관되게 나타났다. 당연히 나와 같은 생각의 늪에 빠진 이들에게 ‘설정한다’란 표현은 꽤 요긴한 밧줄이 되어주곤 했다.
설정이 잠정적이라는 인식은 선택에 대한 부담을 확 줄여준다. 많은 멘티들이 ‘이 선택이 맞을까’라는 질문에 스스로를 묶어두지만, 반대로 끊임없이 직접 해보는 것을 그래서 나는 강조한다. 이는 설정을 가볍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설정 이후의 행동과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유연한 태도가 있어야 선택 부담을 덜고 다양한 실험으로의 여지가 발생한다. 선택을 영구적인 낙인처럼 여기지 않고, 현재의 조건에서 가장 합리적인 가설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그래서 중요하다. 무지성으로 선택하라는 조언은 아니지만, 선택이 인생을 크게 좌우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오히려 선택은 계기일 뿐, 매 순간 만들어 가며 선택을 완성한다 생각하는 태도가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설정이 영구적이지 않다는 말은 언제든 재설정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실제 답변 사례들을 보면, 첫 직무가 UX가 아니었거나, 여러 번의 우회와 방황 끝에 지금의 역할에 도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 역시 그랬기도 하다.
이를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다음 설정을 위한 경험 축적’으로 봤으면 좋겠다. 차라리 실패를 통해 여러 번 선택의 시험대 위에 서보는 것도 의미롭다. 설정은 경험을 통해 검증되고, 검증 결과에 따라 다시 조정된다. 이 과정 자체가 어쩌면 커리어라는 것의 본질에 가깝다. 만들어가는 과정과 형성에 집중해야 한단 것이다.
끝으로, 설정을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해도 근본적인 불안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다만 불안 속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유연성을 깨닫게 된다. 여러 답변을 통해 공통적으로 느꼈던 톤은, 확신보다는 책임이다. 선택은 확신을 가졌기에 하는 행동이 아니다. 선택에 대해 책임질 수 있겠다는 다짐과 선언에 더 가깝다.
지금의 설정이 최선이라고 믿고 임하되,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함께 끌어안는 자세다. 저는 이것이 ‘설정한다’는 개념을 가장 현실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