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실행의 연료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계획은 실행이 보장되지 않는 가정에 불과하기 때문에, 계획만을 근거로 실행의 구조물을 세우는 것이 위험하다. 이는 내 경험담이기도 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가고 싶었던 학교와 연구실도 정해져 있었다. 얼마나 좋아했으면 외부 행사에도 참석 가능할 경우에는 참석해 가며 열의를 표현하기도 했다. 교수님도 미리 만나 뵙고 분위기도 다 좋았다. 근데 결국은 떨어졌고, 이후 재도전 끝에 또 떨어지고 만다.
돌이켜보면 이유는 명확했다. 면접 발표에서 나 자신을 너무 많이 보여주려는 과도한 욕심이 화근이었다. 학업계획이나 나와 연구실의 연결 접점에 대한 가치를 말하기보다는 나를 뽑아야 하는 내 가치를 설파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결과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결과만 얻고만 것이다. 내용뿐 아니라 형식도 그랬다. 마케팅적인 접근은 학구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게 다가갈 뿐이었다. 떨어지는 게 사실 당연했지만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더 문제는, 마음이 앞선 만큼 많은 계획을 합격을 전제로 그 위에 세워두었던 점이다. 즉, 아무런 플랜 B도 없이 1년 동안의 성과란 두 번에 낙방 외엔 안 남은 한 해를 스스로에게 주고 만 것이다.
낙방을 했다는 것은 곧 실행을 했다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플랜 B 없이 순방향으로 모든 계획을 짜놓은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결국 실행이란 했다는 행위 못지않게 실제로 내 손에 쥐어진 명확한 결과를 갖고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로 정의가 가능하다.
이런 실행이 동반되지 않은 것은 계획은커녕 단순한 사고실험에 불과하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특히 기업 조직 내에서는 실행 가능성과 성과 가능성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의 계획은 쉽게 무력화되기 일쑤다. 많은 조직에서도 ‘플래닝 드리븐(planning-driven)’한 접근보다는 ‘액션 드리븐(action-driven)’한 움직임이 더 신뢰를 받는 이유다. 제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실행을 통해 얻어진 인사이트가 누적되지 않으면 조직 내 신뢰도 역시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나를 어필할 때도, 계획보다 “작게라도 검증한 실행 사례”를 덧붙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A라는 서비스를 기획한다고 했을 때, 하다못해 주변 친구들을 통해 프로토타이핑을 통한 모의실험이나 파일럿 등을 진행하거나 간단한 리서치를 통해 사용자 반응을 수집한 뒤 제안하는 것은 모종의 결과를 가지고 하는 딜이기에 승산이란 게 산정 가능해진다. 그렇게 해야만 계획의 허구성이 줄어들고 설득력 있는 논리 구조가 생기기 때문이다.
다만, “계획을 전제로 건물을 올려선 안 된다”는 해석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경계하고 싶다. 모든 실행은 그 실행의 기준이 되는 어떤 ‘의도된 설계’에서 비롯되며, 이 설계는 필연적으로 계획의 형태를 띤다.
문제는 계획 그 자체가 아니라 “계획을 절대적인 디딤돌로 착각하는 태도”다. 계획이 꼭 무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계획은 “명확한 기준점”이 되어준다. 문제는 그것을 너무 낙관하지 말란 점이 포인트다.
실제 업무에서도 초기 계획과 실행 중 수정된 계획, 그리고 종료 후 회고된 계획을 나눠 구분하고, 각 단계마다 배운 점과 보완점을 기록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즉, 계획은 변화를 전제로 수립하고, 실행은 가정을 수정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어야 한다.
UX 분야에서는 ‘계획’이라는 말보단 차라리 리서치 결과 기반의 페르소나, 시나리오, 유저 플로우, IA, 와이어프레임 등의 형태로 구현되곤 한다. 이 모든 산출물 역시 실행 전 단계의 잠정적 ‘설계’ 형태로 볼 수 있는데, 이를 “사용자 중심 실행을 위한 가설”이라 정의하고 싶다.
다만 문제는 많은 주니어들이 이 가설 자체를 완성품처럼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만들면 사용자가 잘 쓸 거예요’라는 가정이 마치 확정된 사실인 것처럼 전개되곤 하죠. 게다가 작업을 하며 애정과 애착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제법 보았다.
하지만 사용자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이며, 시장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투성이다. 그래서 계획을 세울 때 항상 “실행을 위한 디딤돌인지, 그 자체로 목적화된 문서인지를 구분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실제로는 단 하나의 화면도 실행해보지 않고 '이 플로우가 맞다'라고 주장하는 기획서를 보면 안타깝기까지 하다..
경험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계획’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계획’이다. 또한, 계획을 수립했으면 그것이 제대로 실행되었는지, 실행이 실패했으면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를 분석하는 ‘회고’가 따라와야 진짜 가치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성공을 해야만 그 계획이 의미가 되살아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했던 잘 진행된 프로젝트의 공통점은 초기 계획의 정교함도 중요하지만, 빠르게 MVP를 만들어 실행하고 그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개선한 경우가 더 많았다. 반면 잘못된 계획을 맹신하거나, 일정상의 이유로 유효성 검증을 생략했던 프로젝트는 대부분 시간이 흐른 뒤 무언가 좋지 않은 현상들이 꼭 뒤따랐다.
예컨대 계획은 건물을 세우는 데 꼭 필요한 기초공사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땅이 단단한지 아닌지를 실행을 통해 지속적으로 점검하지 않는다면 결국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계획 수립이 곧 안전성 검증이나 완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획은 계획일 뿐이다’라는 말은, 계획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계획을 절대시 하지 말고 실행과 병행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UX 직무는 특히 실행을 통해 학습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초반에는 완벽한 계획보다 빠르고 가벼운 실험을 통해 진짜 문제를 찾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