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요] 유엑서로 일하고 싶어요 #047

by UX민수 ㅡ 변민수


졸업을 앞두고 조심스레 기획자를 꿈꾸게 되었지만, 그런 생각이 마치 시각디자인 전공자로서 스스로 진중하지 못하거나 내심 ‘불순하다’는 인상을 줄까 봐 스스로를 자체 검열했던 시기가 있었다.


남들 눈에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갈피를 못 잡는 미숙아로 보였을 그때의 나는, 차라리 예술가를 꿈꾼 적도 있었다. 내 성향에는 그게 더 맞다고도 생각했고, 심지어 그렇게 봐주는 이들도 많았기에. 하나 그것도 내밀하게 들여다보자면, 결국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마음의 신호였음을 실은 자각할 수 있었기에 쉽지가 않았다.


이렇듯 진로에 대한 깊은 고민과 자기 인식이 절절했던 시기의 기억을 담아서 쓴 문장이었다. 이 글은 혹시라도, 아니 제법 많이 존재하고 있을 나와 같은 이들을 향한 선험자의 위로다. 그 시절 내가 받고 싶었지만 받지 못했던.




기획에 대한 관심, 그 진지함


우선, 기획이라는 분야에 관심이 생긴 것이 결코 ‘불순하다’고 여겨질 사안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디자인(D)은 ‘형태를 만드는 것(d)’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제의 본질을 발견하고 해결하는 과정(D)’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실은 기획과도 충분히 맞닿아있다. 아니 이 중첩된 영역은 생각보다 크고 넓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입장에서는 ‘기획자’라는 커리어 목표가 어쩐지 전공을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느끼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따가운 눈총에 쓰라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훌륭한 디자이너(d)는 그런 식으로 심술부리지 않, 아니 존중해 주는 게 상식이니까.


그리고 세상에 나와보니 디자인(d) 전공을 하고도 서비스 기획자, 마케터, 데이터 분석가, 혹은 연구자로 커리어를 확장해 간 이들이 정말 많았다. 오히려 디자이너(D)이면서 디자인(d)에 뿌리가 없어 허전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굳이 옳고 그름을 가름하자면 누가 옳고 누가 그럴까? 당연히 틀렸다. 그런 잣대 자체가 어색할 뿐.



도피 심리의 자각과 진짜 동기의 구분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도피심리였음을 자각했다’는 지금 봐도 참 솔직한 문장이다. 그 시절의 나로 빙의하면,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아무런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겠는 어느 비행체 칵핏에 앉아 뭘 만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난감해하는 것처럼, 바쁘게 했던 일이란 그저 고민 또 고민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설사 처음의 그 열망이 어떤 ‘도피’에서 출발했더라도, 그 경험을 통해 점점 구체화해 나가면서 ‘진짜 동기’로 전환하는 과정 또한 대단히 자연스러운 커리어 여정이라고. 그러나 나를 가까이에서 봐주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이들의 본심은 따뜻하지 못했다. 나와 내 커리어 여정이란 냉정은커녕 그저 차갑게 식어만 갔다.


UX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도, 이게 진짜 내 일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 하지만 해보면서, 실패도 해보고, 팀에서의 역할도 달라지며 점점 ‘이게 내게 맞는 일’이라는 감각을 얻을 수 있어 기뻤다. 그것은 어떤 불합리와 부조리와는 단단히 구분이 가능한 별도 레이어에 드리워진 따끈따끈한 이성의 그림자였다. 그러니 초기의 불완전한 동기가 날 휘감고 있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획자의 역할과 디자인과의 연결점


놀랍게도, 기획자라는 역할 자체도 사실 매우 다양하다. 아니, 꽤 모호하다. 어쩌면 UX 보다도 더하면 더할 정도로. 서비스 기획, UX 기획, 콘텐츠 기획, 프로덕트 매니저 등으로 명칭도 역할도 다양하고, 담당하는 업무도 회사에 따라 차이가 크다.


그중 일부는 시각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이해와 경험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용자 흐름과 인터페이스의 중축을 고민하는 와이어프레임 작업, 사용성 테스트 결과의 시각화된 리포트 작성 등은 일반 인문계 기획자의 역량 층위에 디자인(d) 감각을 자연스럽게 덧입히는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편견도 존재한다. 소위 시각쟁이들은 분석력과 이성적 설계에 약할 것이라는. 오히려 꼬리표처럼 달리는 이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나는 철저히 예체능계 질감을 내려놓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때는 이런 나의 선택에 죄책감이 없었다.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무엇(기획이냐 디자인이냐)보다도 자기 서사를 어떻게 정리하느냐로 느낀다. ‘어쩌다 기획자가 되고 싶어진 사람’이라는 이야기보다는, ‘디자인을 하면서 사용자의 문제에 더 깊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제는 문제 정의와 구조 설계에 더 몰입하고 싶다’는 서사가 훨씬 설득력 있고 건강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대부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이들이 보내오는 질문에는 예외 없이 위와 같은 상황설명이 반드시 있곤 했다.


그렇다. 불순한 것도 아니고, 도피도 아니며, 오히려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으로 바라봐야 할 부분이다.




UX나 기획이라는 직무는 애초에 다양한 전공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시각디자인이든, 심리학이든, 공학이든, 그 모든 배경은 결국 UX의 한 조각일 뿐이다. 전공, 미래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는 맞지만, 전공이란 결국 ‘내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무엇이든 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완전하지 않아도, 확신이 없어도, 출발해도 괜찮습니다. 아직 마음속에서 확신이 없다면, 일단 해보자. 조직 안에서 혹은 짧은 인턴 경험으로라도 실제 기획이라는 일을 경험해 보고,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과 감각들을 바탕으로 ‘이게 나에게 맞는 일인지’ 판단하는 것이 더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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