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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문화는 작은 선택의 총합

22.01.17

by UX민수 ㅡ 변민수

* 이 글에서의 디자인, 디자이너는 d/D를 포괄하는 전체상을 전제로 함


일하는 방식이 쌓여 만들어진 풍경


조직문화는 거창한 말 같지만, 사실은 아주 작고 반복적인 선택들로 구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식, 회의 중 누구의 말이 더 자주 반영되는지,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심지어 슬랙이나 회의록에서 쓰는 어휘의 결까지 포함해서요. 이런 선택 하나하나가 쌓여 조직의 고유한 리듬이 되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일을 이렇게 하는 조직’이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조직은 신규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구조적인 설계보다는 눈앞의 실행 속도에 집중합니다. 빠르게 가야 한다는 압박이 크기 때문이죠. 그래서 늘 ‘최소 인원’만 배정되고, 모듈화보다는 단발성 해결책이 우선됩니다. 하지만 이런 선택이 반복되면 점점 일의 구조가 비효율적으로 꼬이게 되고, 결국 나중에 남은 사람들은 그 꼬인 구조를 풀기 위해 더 많은 리소스를 써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건 단지 한두 번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어떤 선택을 계속 고집하느냐에 따라 일이 ‘축적’되고 ‘계승’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사소해 보이는 선택 하나가 단기적 효율을 챙기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조직을 계속해서 ‘빚지고 가는 구조’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조직문화가 선택의 결과이자 동시에 선택의 원인이 되는, 복잡하지만 중요한 지점입니다.



누가 선택하고, 누가 책임지는가


문제는 선택의 구조가 ‘책임지는 사람’과 일치하지 않을 때 더 복잡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많은 경우, 조직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실제로 그 시스템을 직접 써야 하거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조직의 리더이거나 프로젝트를 곧 떠날 관리자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선 단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기도 하죠. 이런 사람이 ‘그때 당장 편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조 설계보다는 빠른 대응, 장기적인 안정성보다는 단기 실적을 우선시하는 방식 말이에요.


문제는 그 선택의 결과를 나중에 치우는 사람은 대부분 현장에 남아 있는 실무자라는 점입니다. 특히 디자인 조직은 그런 피해를 자주 겪는 쪽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디자이너는 무언가 ‘정리된 산출물’을 남겨야 하는 직무이고, 시스템을 시각화하고 정합성 있게 보여줘야 하니까요. 그래서 혼란스러운 구조를 수습하고, 논리 없이 만들어진 결과물에 스토리를 부여하고, 뒤늦게라도 일의 맥락을 끌어내려 애쓰는 역할을 떠안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조직문화란 어지르는 사람과 치우는 사람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이때 어지르는 사람은 늘 '디자이너'는 아닙니다. 실은 디자이너는 치우는 사람일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문제를 시각적으로, 구조적으로, 혹은 서비스 흐름상으로 정리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조직 안에서는 여전히 ‘디자이너는 크리에이티브하게 뭔가 던지는 사람’으로 오해받는 경우도 많죠.



‘정리하는 사람’으로서의 디자이너


이쯤에서 디자이너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디자이너는 단지 예쁜 UI를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디자이너는 일의 흐름을 파악하고, 사용자뿐 아니라 조직 내부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복잡한 과정을 정리해 내는 역할을 합니다. 사실은 가장 마지막까지 구조를 고민하고, 남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인 셈이죠.


조직 안에서 발산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의견을 제시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던지는 것은 그만큼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건, 그 아이디어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현실에 맞게 녹여내며, 실제 실행 가능한 구조로 만들 것인가입니다. 그게 바로 수렴의 역할이고, UXer가 조직 내에서 진짜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정리’는 단순한 문서화 작업이나 보고서 정리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과 개선 제안까지 포함됩니다. “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늘 이런 식으로 회의하지?”, “이 기능을 넣자는 결정은 누구 기준이지?”, “이 흐름을 유지하려면 나중에 어떤 리소스가 더 필요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설계하는 역할, 그게 디자이너의 또 다른 일입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필요한 감각


물론 현실에서는 이런 질문이 늘 환영받는 건 아닙니다. 빠르게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이미 정해진 예산과 일정,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 속에서 디자이너의 목소리는 가볍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실무에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디자이너의 의견은, 결정의 테이블에선 배제되기 쉬운 구조를 띄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의견이야말로 현실적으로 작동 가능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건 ‘누가 선택하느냐’보다 ‘누가 결과를 책임지느냐’는 점입니다. 그 책임이 명확히 연결되어 있을 때, 조직은 건강해집니다. 반대로 결정자는 떠나고 실무자만 남아 수습하는 구조는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특히 디자이너가 반복적으로 그런 상황을 겪게 되면 조직 전체의 창의성과 생산성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결국, 선택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속도보다는 감각이고, 단기적인 해법보다는 구조적 고민입니다. 디자이너는 그 ‘감각’을 조직 안에 퍼뜨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조직문화는 결국 선택의 방식


마무리하자면, 우리는 ‘조직문화’라는 말을 너무 막연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실체입니다. 결국 조직문화란, 어떤 선택을 반복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어떻게 수습하며, 그런 사이클 안에서 누가 어떤 역할을 맡는지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즉, 느리지만 가변적입니다.


디자이너는 그 안에서 조율자이자 정리자이고, 동시에 더 나은 선택을 유도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창의적인 솔루션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혼란을 구조로, 무질서를 논리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조직문화라는 큰 틀 안에서 디자이너는 단순한 실행자가 아니라, 선택을 디자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 이 글이 그 메시지를 조금 더 선명하게 전달하길 바랍니다.



Photo by Manyu Varm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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