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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해줘"와 "해라" 사이에서

부탁하는 인간 vs. 명령하는 인간

by UX민수 ㅡ 변민수


작은 차이, 깊은 간극


우리는 AI에게조차 스스로의 태도를 드러낸다. "AI야, 해줘"라고 말할 때와 "AI야, 해라"라고 말할 때. 이 두 표현 사이에는 생각보다 깊은 간극이 존재한다.


"해줘"라는 말에는 희미한 기대와 책임 회피가 동시에 섞여 있다. 부탁하는 말투는 듣는 이에게 여지를 남긴다. 목표는 흐릿해지고, 기대는 막연해진다. 결국 결과물도 애매해진다. 마치 스스로 원하는 것을 분명히 그리지 못한 채, 어딘가를 향해 던져지는 것처럼. 반면 "해라"는 다르다. 목적이 명확하고, 기대가 선명하다. 과정은 통제되고, 책임은 스스로 감수하겠다는 선언이 깃들어 있다.


이 작은 차이는 단순히 어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주체성을 지키는 방식에 대한 문제다. 그리고 지금, 이 미묘한 언어 선택은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AI 시대, 인간에게 필요한 것


사실 "해줘"에 익숙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는 협업을 중시하고, 인간관계에서 부드러운 소통을 장려해 왔다. 명령보다 요청, 강요보다 협력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특히 서비스 산업이 주를 이루는 사회 구조 속에서는 부탁하는 언어가 인간관계의 기본 매너처럼 자리 잡았다.


문제는 이 습관이 AI와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AI는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공감을 기대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습관처럼 "해줘"라고 말한다. 무의식적으로 결과에 대한 책임을 AI에게 떠넘기며, 스스로 목표를 뚜렷이 설정하지 않은 채 결과만 기대한다.


이는 인간이 점점 주체성을 잃어가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선택은 많지만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시대. 목표를 세우기보다 결과만 소비하려는 태도. "해줘"라는 말은 그런 시대의 무심한 표지판처럼 우리 입에서 튀어나온다.



구체적인 장면 하나


예를 들어보자. 한 창작자가 AI에게 “포스터 하나 멋있게 만들어줘”라고 요청한다. 결과는 어떤가? 수십 개의 포스터가 생성되지만, 그 어떤 것도 정확히 원하는 느낌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왜일까? "멋있게"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창작자 스스로 콘셉트, 대상, 색감, 메시지를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렇게 명령해 보자. "10대 여성을 타깃으로, 활기차고 긍정적인 감성을 가진 포스터를 만들어. 메인 컬러는 연두와 하늘색을 사용하고, '꿈을 향해'라는 슬로건을 삽입해." 이렇게 구체적인 방향과 조건을 제시하면,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눈에 띄게 정확해진다. 이 차이가 바로 주체성의 차이다.


"해줘"는 기대만 남기고, "해라"는 설계를 요구한다. 디렉터는 뒤에서 결과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설계하고, 명령하고, 결과를 점검하고 수정한다.



방향 없는 도구는 아무것도 아니다


AI는 이미 인간을 능가하는 연산 속도와 분석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방향성이 주어지지 않는 AI는 여전히 무기력하다. 목적 없는 능력은 방향을 잃은 배와 같다. 아무리 엔진이 강력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 바다를 표류할 뿐이다.


AI는 스스로 방향을 설정할 수 없다.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판단, 인간의 목표가 없다면, AI는 그저 무한 반복하는 기계일 뿐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방향을 세우고,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인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방향을 묻는 대신, 결과만 소비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 우리는 언젠가 스스로 만들어낸 도구에게 길을 묻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언어로 말할 것인가


결국, 선택은 우리 몫이다. AI에게 "해줘"라고 부탁하는 인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해라"라고 명령하는 인간이 될 것인가.


"해줘"는 편하다.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실패하면 탓할 대상도 있다. 그러나 "해라"는 다르다.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그 결과에 대한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해라"고 말하는 순간, 인간은 다시 선장이 된다. 거대한 AI라는 엔진을 달고, 스스로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


앞으로의 시대에 인간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일을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일을 설계하고 부여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감한다. 우리 모두는 그래서 AI 시대에 디렉터가 되어야 한다. 일을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일을 존재하게 만드는 존재로.



인간다운 주체성을 위하여


AI야, ___해라.

짧은 이 한마디 속에는 인간이 스스로를 잃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힘이 깃들어 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목표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만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과연 우리는 그 힘을 끝까지 쥘 수 있을까? 편안함에 길들여진 손으로,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까? AI라는 도구를 지배하는 것은, 단순한 명령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존재를 끊임없이 묻고 설계하는 행위다.


결국 중요한 것은, "AI야, 해라"를 외칠 수 있는 인간으로 남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AI 시대를 건너는 마지막 인간다운 선택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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