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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서 피어난 꽃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강박엔 강박

by UX민수 ㅡ 변민수


배우는 것은 강박을 얻는 일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배운다’고 할 때 그저 지식을 쌓거나 기술을 익히는 행위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정밀히 들여다보면, 배우는 것은 결국 '강박을 얻는 과정'이다. 더 정확히는, 세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을 체득하고, 그 방식에 얽매이게 되는 일이다. 전문성이란, 결국 얼마나 세련되고 정교한 강박을 지녔는가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배우는 순간, 우리는 자유롭다. 어떤 규칙도, 어떤 옳고 그름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우는 동안, 우리는 규칙을 받아들이고, 옳고 그름의 구분을 심는다. 때론 강하게 훈련받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특정 방향으로만 반응하는 몸과 마음의 습관, 즉 강박이 자리를 잡는다. 한편 잘못 배운다는 것은 이 과정이 과도하거나 편향되어, 불필요한 강박까지 짊어지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필요한 만큼만 채워야 할 강박을, 넘치게 받아버리는 것이다.



강박은 시간의 예술


이러한 강박의 문제는 예술적 훈련 과정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예를 들어 보컬 트레이닝을 생각해 보자. 노래를 처음 배우는 이들은 흔히 좁고 경직된 소리를 내는 습관을 지닌다. 이는 말하자면 '좁은 소리'라는 강박이 몸에 새겨진 상태다. 이 강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단순히 '힘을 빼라'는 이성적 지시로는 부족하다. 몸은 머리보다 느리게, 그리고 훨씬 완강하게 저항한다. 몸이 이미 학습한 관성을 머리로 명령해 고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훈련이란 몸이 새로운 관성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시간의 투자다. 예를 들어, 좁은 소리의 강박을 이기기 위해서는 오히려 가성을 내는 '새로운 강박'을 도입해야 한다. 가성은 물리적으로 목의 긴장을 풀고, 소리의 통로를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처음에는 이 또한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가성의 방식이 몸에 스며들어 기존의 잘못된 강박을 덮고 대체한다.



새로운 강박은 구속이자 탈출구


이렇게 보면 우리는 하나의 강박을 다른 강박으로 덮는 식으로 성장한다고도 볼 수 있다.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혹은 실속 있는 구속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새로 얻은 강박 또한 언젠가 나를 지배하는 족쇄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훈련을 통해 좁은 소리에서 벗어난 보컬이, 또다시 가성에만 의존하는 보컬로 굳어질 위험을 항상 안고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전문가란 해당 필드에서 발생 가능한 다양한 강박을 잘 다루는 사람이다. 무작정 강박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박의 본질을 인식하고, 필요할 때는 기꺼이 교체하고, 필요할 때는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사람. 스스로 쌓아 올린 체계조차, 필요하다면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 그렇기에 진정한 훈련은 기술을 닦는 것이 아니라, ‘강박을 스스로 경영하는 감각’을 기르는 일에 가깝다.



빠른 성장은 강박의 경영


우리는 종종 이렇게 묻는다. 왜 어떤 사람은 같은 시간 동안 훨씬 빠르게 성장하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강박을 얻는 속도와 강박을 버리는 속도, 두 가지 모두를 단련해 왔기 때문이다. 배우는 데에만 능숙한 이들은 자신의 낡은 강박을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성장의 벽에 갇힌다. 반대로, 버리는 데에도 능숙한 사람은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가능성을 심을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왜 그렇게 쉽게 무엇이든 흡수할 수 있을까? 그들은 아직 '강박'이 없다. 배움과 놀이의 경계가 없는 존재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갈수록, 배운다는 것은 곧 스스로에게 또 하나의 강박을 얹는 일이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부정도, 무비판적 수용도 아니다. 어떤 강박이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고, 어떤 강박이 나를 옥죄고 있는지를 가려보려는 냉철한 의식이다.



강박 위에 서서 다시 걷기


모든 훈련의 끝에 기다리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더 정교한 구속, 더 의식적인 관성이 기다린다. 그러나 그 구속은 단지 나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깊고 멀리 데려다줄 도구가 된다. 내가 어떤 강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도구는 나를 키우기도 하고, 나를 가두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새 강박을 만들고, 끊임없이 낡은 강박을 버리는 존재다. 잘 산다는 것은 어쩌면, 그 둘 사이를 오가면서 자신을 조율하는 일일지 모른다. 강박을 얻고, 강박을 넘어서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여전히 나 자신임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배우고, 성장하고, 살아간다는 것의 진짜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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