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을 끝내려는 욕망이 답을 만들어낸다
내가 유튜브라도 한다면 아마 ‘사바사무새’란 표현은 반드시 나왔을 댓글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봤다. 게다가 이 글로 인해 스스로 낙인을 자청하는 멍청이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 메타인지에 따르면, 나라는 멘토에 관한 첫 번째 비판 아닌 비판은 뭐든지 “상황마다 다르다”는 식의 귀결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는 내 책도 그렇게 읽히는 경우가 있더라.
사람들은 ‘다르다’는 말보다 ‘맞다’는 말을 원한다. ‘다르다’는 말은 판단을 유예시키고, 확신을 밀어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 말을 불편해한다. 특히 조언을 구하는 자리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상황마다 다르죠”라는 말은 너무 합리적이어서, 오히려 무책임하게 들린다. 그 순간 상대는 나를 멘토가 아니라 회피하는 사람으로 본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믿는 건, 세상에는 ‘틀림’보다 ‘다름’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 말이 현실의 불안을 덜어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불안을 느끼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진리보다 확신이고, 명쾌한 해답보다 손잡아주는 말이다. 그래서 ‘상황마다 다르다’는 문장은 언제나 실패한 위로처럼 들린다.
우리는 늘 답을 찾는다. 질문을 던지는 이유도 결국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다.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 걸까?”, “이게 맞는 선택일까?” 이런 질문들의 바닥에는 언제나 확실함에 대한 갈증이 깔려 있다. 나 역시 그랬다. 멘토가 되어 조언을 건네기 전에는, 늘 누군가에게 답을 구하던 사람이었다. 불안한 시기에는 확신 있는 사람의 말이 이상할 만큼 달콤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불안을 종식시키려는 욕망이야말로 가장 쉽게 타협하는 지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불안을 해결하려고 하면서, 사실은 사고를 멈춘다. 누군가의 답을 들으면 마음이 잠시 편안해지니까.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통제다. 문제를 잠시 잊게 해 줄 뿐, 문제의 구조를 바꾸지는 않는다.
멘토링의 가장 큰 함정은 바로 이 지점이다. 불안을 덜어주려는 마음이, 답을 대신 말하게 만든다. 나는 그게 오히려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답을 주는 순간, 상대의 사유를 멈추게 만들기 때문이다.
불안은 원래 멈춰야 하는 게 아니라,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견디는 힘을 길러주는 게 멘토의 역할이지, 그 과정을 지워주는 게 아니다. 그러니 “상황마다 다르다”는 말은 결국 회피가 아니라 정직이다. 세상을 단순화하지 않으려는 태도이자, 타인의 불안을 대신 덮어주지 않겠다는 윤리적 선택이다.
사람의 말에는 늘 유혹이 있다. 조언을 구하는 눈빛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뭔가를 대신 말해주고 싶어진다. “이쪽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해도 돼.” 그 한마디는 상대의 어깨를 가볍게 해 준다.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도움을 줬다’는 착각을 선물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상한 후회가 찾아온다. 그때 내가 준 건 ‘해답’이 아니라 ‘면피’였다는 생각이 든다. 불안을 없애주는 대신, 불안에서 배울 기회를 빼앗았던 것이다.
나의 조언은 친절했지만, 교육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멘토가 아니라, 단지 상대의 불안을 대신 덮어준 사람에 불과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보통의 멘토링을 ‘불안의 거래’라고 부르고 싶다. 한쪽은 불안을 덜고 싶어 하고, 한쪽은 그 불안을 잠시 대신 들어준다. 그러나 진짜 배움은 그 거래가 끝난 뒤에야 시작된다. 불안을 끝내려는 욕망을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문장이 만들어진다. 불안을 통과하지 않은 확신은 늘 얄팍하다. 그런 확신은 작은 변수 하나에도 무너진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렇게 답한다. “지금 느끼는 그 불안이, 방향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도 있어요.”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만 진짜 배움이 일어난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럼 결국 아무 말도 안 하겠다는 거잖아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상황마다 다르다”는 말은 회피가 아니라 윤리라는 것을. 누군가의 인생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려는 시도야말로 오만이다. 나는 단언 대신 망설임을 택한다. 왜냐하면 그 망설임이야말로 타인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멘토링의 목적은 정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바꿔보게 하는 데 있다. 그래서 나는 내 말이 언제나 조건문으로 끝난다. “만약 당신이 이 불안을 성장의 증거로 본다면…”, “만약 당신이 그 일을 통해 배움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이런 문장은 마음 편한 답을 내어주지 않는다. 대신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그 여백이야말로 멘토링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결국 나라는 멘토는 불안을 지워주는 사람이 아니라, 불안을 오히려 남겨두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불친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정직한 방식이다. 불안이 사라진 자리에는 확신이 생기지만, 확신이 자라난 자리에는 생각이 멈춘다. 나는 그 순환의 위험을 너무 많이 봐왔다.
그래서 오늘도 누군가 내게 묻는다. “멘토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답한다. “그건… 상황마다 다르죠.” 그 말이 비겁하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그 말이 상대에게 불안을 덜어주진 않더라도, 적어도 스스로의 불안을 탐색하게 만드는 문이 되길 바란다. 그게 내가 믿는 ‘사바사무새’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