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냥을 안다는 건, 멈출 줄 안다는 것
휴식은 번아웃 이후에 주어지는 트로피가 아니다.
애덤 그랜트의 책 『생각 수업』에서 이 문장을 읽고 좀 멍해졌다. 얼마나 익숙한가, 버티고 버틴 자만 쉬어도 되는 문화. 지친 몸을 질질 끌고 와서야 "이제 좀 쉬어도 돼"라고, 누구보다도 내가 나에게 허락하는 방식.
하지만 왜 꼭 그렇게까지 가야 하는 걸까. 왜 우리는 휴식을 ‘포상’으로만 여길까. 체력도 정신도 모두 소진된 다음에야 비로소 멈추는 이 패턴, 이상하지 않나. 사실 휴식은 상이 아니라 권리다. 아무것도 이루지 않아도, 그냥 오늘 피곤하면 쉬어도 되는, 당연한 일상 중 하나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써왔다. 그런데 그 ‘열심히’란 도대체 누가 정한 기준일까. 누군가는 6시간 자면 충분하다 하고, 누군가는 주말도 일한다며 자랑한다. 속도가 기준이 되고, 비교가 동력이 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내 깜냥’을 잊어간다.
깜냥은 단지 체력이나 실력이 아니다. 내 상태를 알아채는 감각이다. 지금 이 일은 나에게 과한 건 아닌지, 오늘은 휴식을 먼저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나답게 일하고 있는 건지—그걸 아는 능력. 하지만 우리는 그걸 인정받기보다, 참는 걸 칭찬받으며 살아왔다.
예전엔 ‘자기 관리’란 말을 들으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기술 같았다. 좋은 식사, 적당한 운동, 충분한 수면 등 더 많은 성과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달라졌다. 관리가 아니라 관찰에 가깝다. 내 감정의 파동, 피로의 리듬, 몰입의 순간을 스스로 캐치하는 일. 거기서부터 진짜 관리가 시작된다.
그래서 나도 요즘은 조금 덜 달구고, 덜 견딘다. 더 멀찌감치 무리가 보으면 미리 느리게 멈추고, 텅 빈 시간이 필요하면 일부러 비워둔다. 예전엔 불안했지만, 지금은 안다. 그 비움이 있어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걸. 근데 이걸 알려면 내 한계에 바싹 부딪혀 봐야 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다.
이상한 말 같아도 쉬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다. 처음엔 괜히 눈치 보인다. 남뿐만 아니라 내 내면에게도.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 같은 죄책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그 감정조차도 지나간다. 휴식은 퇴보가 아니라 회복이다. 잠시 멈춘다고 내 자리가 없어지지 않고, 조용히 쉬었다고 해서 나의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멈춰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진짜 쉬는 법을 아는 사람은 다시 나아갈 때 더 단단하다. 멈출 줄 아는 사람이, 달릴 줄도 안다. 쉼은 게으름의 반대말이 아니라, 건강한 ‘탐색’의 일부다. 그렇다고 억지로 쉬는 것은 또 다른 일이 된다. 진짜 잘 쉴 줄 아는 기술, 이거 배우기 실은 쉽지 않다. 천생 한량이 아니고서는.
결국 중요한 건 내 깜냥을 아는 일이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어"가 아니라 "지금은 안 해도 괜찮아"를 말할 줄 아는 자신감 있는 태도. 모두가 바쁘고 열심히 사는 시대일수록, 자기만의 속도를 지키는 사람이 결국 오래간다.
깜냥을 안다는 건, 기준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 것이다. 남이 1시간에 끝내는 걸 난 하루 걸려도 괜찮고, 누구는 새벽에 집중되지만 나는 오전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이 모든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바로 자기 깜냥이다.
그리고 그 깜냥은, 무너져 봐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더 자주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조절하고, 멈추는 연습을 해야 한다. 지금도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지금 내가 필요한 건, 더 열심히가 아니라 잠깐의 쉼일지도 모른다.
준비생 그리고 취준생에게 쉼이란 사치 같다. 그렇지 않다. 회사는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감동하고 탄복해 일자리를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란 나 자신을 위한 합리화에 가깝다. 효율이 더 중요하다. 그러려면 잘 쉴 줄 알아야 한다. 온오프가 명확한 스위치처럼 달릴 때 걸을 때 멈출 때를 잘 구분해야 필요할 때 스프린트를 해낼 수 있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에너지 관리의 핵심은 에너지를 여유 있게 잘 쓰는 것, 이를 위해서는 잘 쉬는 법도 꾸준하게 연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