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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가성비를 외칠 때

by UX민수 ㅡ 변민수


모두가 말한다: 싸게, 빨리


회의실에서 고위 임원이 말한다. “일단 싸게, 빨리 해봅시다.”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말이다. 어느새 이 문장은 일상어가 되었고, 의사결정의 기본값이 되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말한다. “그건 시간 너무 오래 걸려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요?” 여기서 말하는 ‘싸게’는 비용이 아니라, 노력의 최소화를 의미한다.


돈이든 시간이든, 적게 들이고 많이 얻는 것이 중요한 시대. ‘가성비’, ‘가심비’, ‘노력 대비 효율’이라는 말들이 일의 기준이 되고, 태도의 언어가 된다.


주니어도, 임원도 각자의 방식으로 ‘low cost’를 외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사라진 한 가지가 있다. 사용자 이야기다. 누구도 사용자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 UX를 말할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사용자 관점은 점차 ‘사치’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지금, 사람을 잊은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이 일을 하나


UXer로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 내 안에는 분명한 신념이 있었다. 사람을 중심에 두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일정, 예산, 리소스, 우선순위. 모든 것이 사용자보다 앞에 있었다. 벌써 옛말이다.


리서치는 잘려 나가고, 통밥이 먹힌다. “그거 없어도 대충 만들어지잖아?”라는 말 앞에서, 나는 점점 침묵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책상머리 출신 UXer는 특히 언제나 외톨이다.



문제를 말하는 사람은 환영받지 못한다


UXer는 본질적으로 문제를 말하는 사람이다. 사용자의 불편을 끄집어내고, 잘 굴러가는 것에도 의문을 던진다. 하지만 회의실 안에서 문제를 말하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그리 반가운 존재는 되기 어렵다. 우리는 종종 ‘지적질하는 사람’으로 비친다. 혹은 현실 눈치가 부족한 사람.


그래서 조용히 입을 닫거나, 말의 표현이라도 바꾸게 된다. 설득보다 체념이 능사일 때도 많다. 어느 순간, 침묵이 생존의 방식처럼 되어버린다.


사실 인풋 최적화는 틀린 방향은 아니다. 문제는 인풋 최적화가 스마트한 방향이란 전제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직하게 인풋을 쏟아야 하는 경우도 있기에 인풋 최적화는 우리가 얻을 결과조차도 최적화한다는 그늘을 가진다. 하지만 이 그늘은 대개 스마트하지 않다는 선입견에 가려져 노출조차 안되곤 한다.



말의 방식이 전략이 된다


또한 사용자 중심 언어가 종종 조직의 언어가 아니라는 점도 원인이다. 그래서 UXer는 언어를 바꿔야 한다. “사용자가 불편해요”라는 말은 “전환율이 떨어질 수 있어요”로, “뎁스가 너무 많아요”는 “리텐션을 높이려면 개선이 필요해요”로 번역된다. 그래도 될까 말까다.


사용자의 불편을 비즈니스 리스크로 풀어내야, 비로소 누군가 들어준다. 이건 타협이 아니다. 전략이다. UXer가 살아남기 위해 익혀야 할, 말의 훈련이다.



외톨이여도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말할 때, 누군가는 “잠깐, 이게 맞는 길인가요?”라고 물어야 한다. 그 역할이 바로 UXer다. 외로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질문이 없으면, 조직은 결국 사용자 없는 제품을 만들게 된다. UXer는 고립 속에서도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자, 자존감이다.


하지만 외톨이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밖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혼자 감당하지 말고,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대화하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경험을 나누자. 외부에서의 대화가, 내부에서의 용기를 키워준다. 그래야 다시 회의실에서도, ‘사용자’를 말할 수 있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우리는 UXer니까


UXer는 결국, 사람을 지키는 사람이다. 누군가는 말해야 할 이야기를 대신하는 사람. 그래서 때로는 침묵 속에서도 견디며, 외로이 나아간다. 외롭지만, 그 역할은 필요하다. 그리고 언젠가, 조직은 그 목소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그날까지—우리는 외톨이로 버티자.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UXer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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