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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경력은 두려우면서 불경력은 탐이 안 나요?

경력의 본질은 타이틀이 아니라 태도다

by UX민수 ㅡ 변민수


모두가 두려워하는 건 늘 ‘물’이다


물경력이라는 단어는 참 쉽게 입에 오르내린다. 누구나 ‘헛되이 흘러간 시간’에 대한 공포를 품고 산다. 회사에 다녔고, 프로젝트에 이름을 올렸고, 보고서도 썼지만, 막상 내세울 게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그 반대편에 있는 불경력은 좀처럼 탐내지 않는다. 물경력을 피하고 싶다면서도, 불경력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 그 간극이 늘 궁금했다. 두려워하는 건 분명한데, 감히 욕심내지도 못하는 태도. 어쩌면 이 시대는 경력을 증명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증명될 수 있는 경험에는 스스로 선을 긋는 것 아닐까.



불경력은 말보다 몸이 먼저여야 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오래 남는 것들이 있다. 불경력은 그런 것이다. 불경력은 말 그대로 ‘쉽지 않은 경력’이다.


단순히 오래 일했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타이틀이 좋다고 자동으로 쌓이는 것도 아니다.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하고, 남이 대신해줄 수 없는 판단을 해야 한다. 기준이 없을 때는 기준부터 만들고, 책임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실패도 잦다. 결국 몸을 던져야만 얻을 수 있는 경력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불경력을 부러워는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무게를 감당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는다. 말로 설명되기 전에, 몸이 먼저 알고 있는 시간. 나는 그것을 욕망하기보다, 먼저 감당할 준비부터 해야 했다.



가성비라는 이름의 회피


이 시대는 ‘가성비’를 숭배한다. 최소한의 인풋으로 최대한의 아웃풋을 끌어내는 것이 스마트함의 기준이 되었다. 가능한 한 아끼고 줄이고, 덜 고생하면서 많은 결과를 얻는 방식이 지혜로운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인풋을 줄이면서도 결과는 남보다 앞서고 싶어한다. 이 모순 앞에서, 불경력은 너무 쉽게 기각된다.


어차피 많은 것을 넣어야 하는 일이라면,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겠다는 자세.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라는 말은 어쩌면 이 세대의 가장 솔직한 심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부러운 경력이란 건, 분명히 ‘그렇게까지 한 사람’에게만 남겨진다.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잊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지금, 불경력은 기회의 이름


이렇듯 안일해서는, 보통의 잣대로는 절대 불경력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이토록 불경력이 기피당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는 일이 예상보다 쉬워졌다고도 볼 수 있다. 모두가 뒤로 물러설 때,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면 된다. 아무도 안 하려고 할 때, 내가 그 자리를 채우면 된다. 경쟁자는 없고, 도전자는 드물다.


불경력은 희소한 만큼 새롭게 특별해졌다. 특별하다는 것은 결국, ‘선택한 사람만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성공 확률은 낮지만, 시도하는 사람조차 적기 때문에 기회는 오히려 넓게 열려 있다. ‘아무도 안 해본 일’이 아니라, ‘모두가 안 하려는 일’을 해내는 것. 나는 거기서 불경력이라는 이름의 기회를 다시 보게 된다.



정말 두려운 건 물경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경력을 두려워한다면, 불경력을 탐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둘 다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경우, 정말 물경력을 두려워하는 게 맞는 걸까? 사실은 욕심은 없지만, 뒤처지고는 싶지 않은 것이다.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남들보다 못해 보이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말하면서도, 자꾸 주변을 눈치 본다. 욕망 없는 체하지만, 비교는 포기하지 않는 태도. 그건 어쩌면 가장 미묘한 자기기만일지 모른다. 나는 그 마음을 잘 안다. 나 역시 그런 시기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나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역설적으로 물경력과 나를 계속 친하게 둘 뿐이다.



욕심이 없다면, 안주를 선택하자


이럴 바에는 차라리 현실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 경력에 대해 아무런 욕심이 없다면, 그저 주어진 삶에 안주하겠다고 솔직히 말하는 편이 훨씬 정직하다. 애매한 욕심만 품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불안해하는 것은 더 고통스럽다. 보통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인정하면 차라리 괜찮다. 그치만 그게 아니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장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한다. 불경력은 그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정말 욕심이 없다면, 깔끔하게 내려놓자. 아니면 욕심이 있다면, 단단히 감당할 준비를 시작하자. 물경력을 두려워한다면, 물경력도 탐내야 하는 이유다. 그렇지 않다면 물경력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안의 모순을 직면하는 시간


물경력을 걱정하는 척 하면서도, 불경력은 탐내지 않는 이 기묘한 자세. 나는 그것이 이 시대의 모순이고, 어쩌면 내 안의 모순이기도 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정말 물경력이 두려운가? 아니면, 그냥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불안한 것뿐인가?

그리고 내가 정말 원하는 건 조금 불타더라도, 진짜 나만의 경력을 쌓아가는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만, 나는 정직해질 수 있다. 물과 불 사이의 시간을 흘려보낼 것인가,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 선택은 늘 그렇게, 아주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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