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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이란 일을 거꾸로 하는 것

계획의 마력과 착각

by UX민수 ㅡ 변민수

계획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사람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빈 종이에 구체적인 목표와 단계를 적어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된다. 계획은 마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손아귀에 넣은 듯한 착각을 준다. 할 일을 시간표에 배치하고, 단계를 도식화하고, 달성 가능한 과업으로 잘게 나누는 순간, 우리는 이미 절반쯤 이 일을 완수한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계획이 주는 안정감이 실행을 미루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제 방향은 정했으니, 곧 하면 되겠지.”라는 안도감은 때로 조용하게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완벽히 마친 것 같은데, 현실의 손발은 여전히 멈춰 있다. 계획이 실행을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실행을 지연시키는 역설이 발생한다.




쌓아 올리는 일과 나열되는 일


세상에는 계획이 반드시 필요한 일들이 분명히 있다. 건물을 짓거나 다리를 놓는 일, 대규모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 논문이나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일은 앞 단계가 뒷단계를 지탱한다. 기초 공정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지고, 누락된 설계가 있으면 후반부는 진행조차 불가능하다. 이른바 “쌓아 올리는 일”이다. 이런 일은 정교한 계획과 차분한 단계적 실행이 필수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런 것은 아니다. 반대로, 우선 작은 행위 하나를 던져놓으면 그것이 모여 전체의 윤곽을 이루는 경우도 많다. 사진을 찍는 일, 글을 쓰는 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는 일, 심지어 인간관계조차도 그렇다. 특별한 계획 없이 나눈 대화와 경험의 조각들이 쌓이며 관계의 맥락을 형성한다. 이런 일을 나는 “나열되는 일”이라고 부르고 싶다.



실행주의의 역설


실행주의는 이 두 번째 부류에서 빛을 발한다. 나열되는 일은 계획보다 행위 자체가 본질이기 때문이다. 작은 행동들이 줄지어 나열되다 보면, 그것이 곧 일의 골격을 만든다. 여기서 계획은 ‘선행 조건’이 아니라 ‘후행 정리’로 바뀐다.


가령 일기를 쓰려할 때, 목차와 주제를 다 정리한 뒤에 쓰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정작 글 한 줄도 쓰지 못할 수 있다. 반대로 그냥 오늘 있었던 일을 몇 문장 적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며칠 치 기록이 쌓이고, 나중에 돌아보니 나름의 흐름과 주제가 잡힌다. 계획은 쓰기 전이 아니라, 쓰고 난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과정의 환상에서 벗어나기


계획이 실행을 대체하는 가장 큰 문제는 ‘과정의 환상’에 있다.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이미 그 길을 걸어본 듯한 착각을 한다. 다이어트 식단을 짜고, 운동 루틴을 만들고, 시간표를 정리하는 순간, 마치 이미 한 달을 버텨낸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실제 몸무게는 그대로이고, 근육도 늘지 않았다. 종이 위의 과정은 몸 위의 결과와 다르다.


실행주의는 이 환상을 거꾸로 부순다. “과정을 먼저 갖추고 실행에 옮기겠다”가 아니라, “실행부터 하고 그 실행이 과정을 만든다”라는 방식이다. 한 번의 실행은 과정의 일부가 되고, 과정은 차례로 쌓이며 결국 계획의 자리를 메운다.



계획을 거꾸로 세우는 법


그렇다면 실행주의적 방식으로 계획을 “거꾸로”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결론부터 던져놓는 것”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더라도, 실행할 수 있는 행동을 하나 택해 먼저 실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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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실행한 행위는 미완의 파편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자체가 하나의 맥락을 만든다. 나중에 돌아보면, 마치 원래부터 계획된 경로를 따라온 것처럼 느껴진다.



계획은 실행의 그림자다


결국 계획은 두 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 쌓아 올리는 일에서는 설계도이자 지도다. 반드시 먼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나열되는 일에서는 실행의 그림자다. 실행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그 형태를 드러낸다.


우리는 대개 전자를 과대평가하고 후자를 과소평가한다. 그래서 “계획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믿음에 갇히곤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계획은 실행 뒤에 붙는 표지판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표지판이 아니라 길을 내딛는 것이다.




계획을 미리 완성하려 하지 말고, 실행이 계획을 불러오도록 두어라. 쌓아 올려야 하는 일에는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지만, 나열되는 일에는 실행이 곧 계획이다. 결론적 행동 하나를 던져놓는 것, 그 나열이 결국 일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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