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올해로 입사 5년 차가 된 방송사 PD입니다. 주로 예능과 다큐 포맷 기획을 맡고 있는데요. 최근 자사 OTT 서비스 확장을 준비하면서, 단순히 방송 콘텐츠만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 흐름을 고려한 기획이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이 어떤 맥락에서 우리 콘텐츠를 발견하고, 언제 이탈하고, 어떤 흐름이 재시청으로 연결되는지… 이게 마치 앱 서비스처럼 UX 관점에서 재구성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콘텐츠 기획도 단순 기획서보다 여정 맵이나 플로우차트를 먼저 그려보며 ‘UX 설계’적으로 접근해보려고 하는데, 이게 방송국 조직 내에서는 조금 생소한 방식이라 팀원들과의 공유나 협업이 쉽지 않습니다.
멘토님께서는 실무에서 UX 흐름을 어떻게 정의하고, 다양한 직군과 어떻게 잘 공유하고 계신가요? 방송 콘텐츠 영역에도 이런 방식이 유효할지 조심스럽게 여쭤봅니다..!
➥ 방송사에서 예능과 다큐 포맷 기획을 맡고 계신 PD 멘티님께서 OTT 서비스 확장을 준비하시면서, 콘텐츠 기획에 UX 마인드가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단순한 콘텐츠 제작이 아니라 시청자의 이용 흐름, 재시청 유도, 이탈 지점 등 전반적인 사용자 경험을 고려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계셨고, 이에 따라 여정 맵이나 플로우차트를 도입해 보셨지만 방송 조직 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접근이라 협업에 어려움을 겪고 계시군요. UX 조직이 오래 정착된 회사라고 해도 사실 다르지 않은 풍경이긴 합니다만, 그래서 또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실무 UX 정의와 직군 간 협업 방식, 그리고 콘텐츠 영역에서도 UX적 접근이 유효한지에 대해 조언을 요청하셨습니다.
저는 UX 마인드가 방송 콘텐츠 기획에도 충분히, 아니 어쩌면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은 시청자가 ‘방송을 시청’하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을 이용’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OTT를 포함한 다양한 디지털 채널은 더 이상 수동적인 시청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사용자는 원하는 콘텐츠를 주도적으로 찾아보고, 중단하고, 다시 보기까지 하며, 심지어 플랫폼 자체를 비교해 가며 이용합니다. 결국 콘텐츠는 사용자 경험 흐름 속에 ‘탑재되는 구성 요소’로 기능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때 ‘콘텐츠 UX’라는 말도 유행하기도 했죠.
따라서 콘텐츠 자체의 퀄리티만큼이나, 그것이 언제, 어떻게, 어떤 맥락으로 소비되는지를 고려한 설계가 필수적입니다. 콘텐츠 접근성, 탐색 과정, 재시청 유도, 이탈 방지 등의 흐름은 전형적인 UX 설계의 주요 고려사항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방송 편성 개념에서 벗어나 콘텐츠와 플랫폼의 사용성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저는 실무에서 UX 흐름을, 한 예로, 사용자 여정(User Journey)의 관점으로 정의하곤 있습니다. 단순히 플로우차트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니즈 변화와 행동 전환의 ‘맥락’을 추적하며 그 포인트마다 감정의 흐름을 분석합니다. 예를 들어, 앱 서비스를 설계할 때는 사용자 유입 채널, 최초 진입 시 인지 상태, 첫 행동, 탐색 후 기대 행동, 이탈 또는 전환 지점 등 전 과정을 하나의 흐름으로 설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무엇을 하게(=느끼게) 만들 것인가’에 중점을 둡니다. 사용자의 감정의 흐름에 따라서 말이죠.
방송 콘텐츠 기획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프로그램을 단위 콘텐츠로만 보기보다, 시청자가 플랫폼 내에서 해당 콘텐츠를 인지하고 선택하고 시청하고 반응하고 확산하는 일련의 여정을 가설로 세워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 단위의 시청률을 살펴보듯 콘텐츠 경험 여정이라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콘텐츠가 아닌 ‘사용자 흐름’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여기에 따라 콘텐츠 포맷이나 진입 방식, 후속 콘텐츠 연계 방식 등도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여정 맵이나 UX 기반의 기획 방식은 전통적인 방송 기획 조직에서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미 비슷한 걸 했었어도 말이죠. 저 역시 과거 유사한 경험이 있었고, 처음에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느냐’, ‘디자인(?) 쪽 일 아니냐’는 반응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실무의 복잡도와 사용자 기대 수준이 높아질수록 ‘전체 흐름을 보는 설계자’로서의 역할이 절실해졌습니다.
조직 내 설득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근거가 필요합니다. 여정 맵 자체를 협업 도구로 활용하기보다, ‘이걸 기반으로 이런 인사이트가 도출되었다’는 식의 결과로는 설득력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이에 설득력은 고객의 목소리가 가장 파워풀합니다. 파일럿 등을 돌려보는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지 않나요?
조직은 문서나 용어보다 ‘성과’를 보고 움직입니다. 성과를 내기 전에 성과를 가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역시나 시청자들의 반응 외엔 없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 콘텐츠의 이탈 지점을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UI를 개선하거나 후속 콘텐츠 노출 방식을 조정해 실제 체류시간이 늘어났다면, 이후에는 오히려 조직이 먼저 이런 방식의 기획을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와 같은 OTT 시대는 콘텐츠의 경험 여정을 분석해서 이러한 시청자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UI 단에 반응할 여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 어렵기도 무궁무진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UX는 어떤 직무 그 자체라기보다 ‘조율의 관점과 방식’이라고 보는 편이 더 이해하기 수월합니다. 저는 다양한 직군과 협업할 때 항상 세 가지 원칙을 따릅니다. 첫째, 최대한 상대의 언어로 설명할 것. 둘째, 더 큰 맥락을 잊지 않을 것. 셋째, 공동의 목표나 성과를 상기시킬 것. 예를 들어 개발자와 협업할 때는 사용자 흐름을 논리의 구조로 재정의해 설명하고, 마케팅과는 사용자 리텐션 지표 중심으로 소통하는 등이죠. 핵심은 ‘같은 그림을 보게 만들되, 각자 익숙한 도구로 풀어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방송 기획에서도 적용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가 방송국의 생리는 잘 모르나 출연자나 작가, 스태프, 마케팅팀 등 다양한 주체가 얽힌 구조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기획자가 시청자(=콘텐츠 사용자) 흐름에 기반한 ‘설계 관점’을 공통으로 품고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생소할 수 있지만, 한두 번의 성공 경험이 생기면 팀 안에서도 UX적 접근이 자연스레 내재화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걸 위해서는 수십 번의 실패가 밑바탕이 될 수밖에 없지만요.
콘텐츠는 궁극적으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러한 질문을 끌어낸 근본 이유일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어떤 감정선으로 전개하느냐가 콘텐츠의 힘을 결정짓습니다. 이러한 요소는 UX 설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능이든 다큐든 시청자의 감정 곡선, 긴장감의 고저, 몰입과 이탈의 타이밍 모두 사용자 경험 설계의 일부입니다. 특히 OTT 기반의 콘텐츠 소비가 일상화된 지금은, 콘텐츠가 소비되는 환경과 흐름이 콘텐츠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콘텐츠 기획에 UX 마인드를 적용하는 것은 시대적 흐름에 부합하는 시도이자, 기획자로서의 확장된 시야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툴을 도입하는 것을 넘어, 시청자라는 ‘사용자’를 중심에 둔 설계가 콘텐츠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기획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길 기대하고 있고, 멘티님의 고민이야말로 그 흐름의 시작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멘티님이 하고 계신 고민은 단지 새로운 방식에 대한 실험이 아닙니다. 저는 이게 ‘기획자로서의 진화’라고 생각합니다. 콘텐츠 중심의 기획에서 경험 중심의 설계자로 관점을 전환하고 있다는 뜻이고, 이는 앞으로의 콘텐츠 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차별화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낯설고 더디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런 변화는 결국 조직을 바꾸고 업을 바꿉니다.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시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시작점에 UX 마인드가 있다는 점에서, 저는 전적으로 멘티님의 방향에 공감하고 응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