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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orent May 15. 2024

불안과 명료함 - 나에게 불안이란 무엇인가

흔치 않은 일기

한번쯤은 꼭 하는 연례 행사 - 나의 불안 마주하기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요근래에 회사를 그만뒀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더 이전의 회사들을 그만둘 때 들었던 감정과 그 기저에 깔린 본연의 이유들이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봤다.


‘왜 저렇게 일하는거지?’

‘저건 무슨 판단으로 그러는거지?’

‘왜 저런식으로 말하는거지?’


불만은 계속해서 쌓여갔고, 내 앞길의 불확실성은 커져만갔다. 그 불확실성은 불안으로 번져갔고, 이따금씩 나에게 불안정의 상태를 안겨줬다.


막막했다.

내가 선택한 길을, 누가 망치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뭔가 살아오면서 거쳐온 일에 당연한 어떤 보상을 원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적당한 4년제 대학 나와서, 적당한 기업에 취직하여, 적당히 사는 삶을 희망하진 않았다.

엄마가 종종 얘기하는 친구의 아들 딸들이 전문직이 됐다거나 대기업에 들어갔다는 소식.


평소 같으면 정말 나한테 아무 타격감 없을 말들이었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쌓여갔던 불만들이 이를 마주하게 되면서 내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러한 별거 아닌 엄마의 볼멘소리 아닌 아쉬움에 하는 작은 말에 하나하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에 문득 초점이 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나는 갑자기 ‘비교’에 민감해졌는가?

과거의 나

중고등학교 때부터 남눈치 안 보고 할 거 하는 성격이었고, 엄마한테는 ‘알아서 공부할테니까 건드리지마’라고 얘기한 후 고등학교 때는 학원도 안 다니고 혼자서 공부하는 또라이기도 했다.

‘나니까 뭐라도 해내겠지 뭐.’ 근거없는 자신감도 분명 존재했다.


불안에 잠식된 나

하지만 근래의 나와 과거의 나는 분명히 달랐다.

그냥 치기의 정도라고 치부하기에는 무언가 큰 차이가 존재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일단 자기 의심이 차지하는 영역이 분명히 커졌다.

어느 순간 위험회피형 인간이 돼있었다.

그리고 그 위험회피에는 어떤 시도가 함의되지 않은, 그저 불확실성에 어느 새인가 굴복해버린 초라한 인간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의 나는 근거없는 자신감의 치기로만 이뤄져 있지 않았다.

‘해야겠어!’라고 생각하면 무작정 해보고, ‘아, 이게 이런거구나’라며 학습을 하면 ‘이렇게 시도하면 되겠지’로 다시 도전하고, 그 도전이 성과를 부르면 습관으로 만들어 꾸준히 행했다.


‘수능’이라는 목표와 목적이 나의 실질적인 행동을 이끌어냈고, 내가 미래에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짜릿한 사회 세계에서 무언가 큰 일을 할 수 있겠지라는 야망은 수험생 기간동안 나름대로의 노력을 지속할 수 있게 해줬다.


‘내가 선택한 길을, 누가 망치고 있는 느낌이었달까.’

누가 망치긴. 내가 망치고 있었다.


내가 최선의 시도 자체를 하지 않은 것에 잠재의식적으로는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 ‘무력감’. 이에 의식적으로 메타 인지를 하고 있던 상황은 아니지만, 나 자신에 대해 ‘쓸모없음’이라는 키워드가 어디선가 불현듯 자라기 시작했고, 자기효능감은 약해져만 갔다.


'그만둠' 자체에 후회가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미련없이 후회하지 않았으려면, 내가 불만을 가지는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해낼 만한 증거를 들고가서 당사자와 논의를 진행했어야했다. '아, 이런 말 했어야했는데!'라는 여지조차 생기지 않게, 후련하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나왔어야 했다는 그런 아쉬움이었달까.


나는 왜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척 했지만, 과거에 무언가 해놓은 것에 너무나 큰 의지를 하고 있었다.

커리어적으로는 PM이 되고 싶다, 정성적으로는 세상에 의미있는 변화를 가져오는 사람들 중 하나이고 싶다라는 목적은 분명했으나, 내 과거가 이를 어련히 수행해주겠지라는 치사한 의존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진짜 나지만 너무 졸렬하고 창피스러운 생각이다.


나의 현재 상태에 대해서 객관화하고 인지한 이후로는, 목적을 위해 수행하는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전전직장을 그만 둔 11월을 기점으로,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시도하고, 더 많이 행동해야 한다.’라는 결심이 생겼다.


또 나의 졸렬한 자아는 출퇴근시간에 책을 읽거나, 집에 와서 공부를 조금씩 하는 게 오히려 더 피곤해지지 않을까라는 우려를 표했다. 그러나 일단 시도하는 것의 중요성을 안 이상, 무조건 해봐야지 싶었다.


변화와 명료함

태어나서 책은 눈곱만도 스스로 읽지 않았던 내가, 6개월간 7권의 원서를 읽었고, 꾸준히 여기저기서 아티클나 리포트도 찾아보게 됐다. 일에 지장이 오거나 하기보다, 오히려 업무적으로 정신이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다. 공부하면서 얻은 좋은 지식들을 내/외부로 적극적으로 공유하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이 내 노력을 보고 새로 뭔가 시작하는 모습도 보게 됐다.


‘아, 맞아! 이런거였지!’


일종의 아노미 현상이라고 치부하기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분명히 있었다. 그냥 내 게으름에 잠식되어, 그리고 적응되어 버려 그 목적 자체를 잊고 살았던 듯 싶다. 하지만 ‘하면 되는구나 난.’이라고 단순히 치부하기에는 치기어린 나와 다를 바가 없다. 뭔가 발전적인 분석을 해보자 하니, 어떤 패턴이 보였다.


1. 나는 추상적인 이상(ex. 세상의 변화, 주변에 도움)을 좇는 사람이다.
2. 그 추상적인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무언가들(ex. 제품, 예술)에 자극받는다.
3. 그 무언가들에 인접한 행위를 하고 싶어 한다.
--- 나의 게으름이 지체시킨 간극
4. 그 행위들을 나름대로 수행해본다.
5. 실패를 하더라도, 의미있는 방식으로 다시 수행해본다. (무한 반복)
6. 뿌듯함을 느낀다.


‘나름대로 수행’의 결여가 나의 선순환을 막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루에 최소한 내 커리어 관련 책 5페이지씩 읽기라는 너무나도 작은 습관이 매일 20페이지 읽기로 확장됐고, 지금은 뉴스레터도 무작정 만들어서 써보고 있는 중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나름대로의 수행. 참 간단한 것이었는데 왜 진작에 하지 못했을까라는 아쉬움도 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이번에는 다른 퇴사인가?

이게 더 분명해진 부분은 '휘슬'이라는 서비스의 내 커리어 가치관 분석(광고 아님)이다.


11월부터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나서, 최선의 결과를 위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안하고 실행해왔다. 하지만 ‘비전과 목적’이란 것이 퇴사 이유가 됐다. 나는 ‘제품 관리’라는 일종의 직무적 방법론을 통해 기술, 디자인을 기반으로 사용 가능한 무언가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가치'를 전달하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러한 부분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고충과 비전에 대해서도 대표님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했고, 결론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커리어 패스를 이 조직에서 만들어 나가기에는 힘들겠다라는 판단을 내렸다.


아쉬움은 크게 없다. 오히려 뭔가 더 맑아진 정신으로 명료함을 얻게 됐다. 내가 누군지, 내가 뭘 하고싶어 하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부분에 조직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추상적인 부분들이 하나씩 걷혀나가고 있다.


‘쓸모없음’의 나태와 권태에서 벗어나, 나아가는 걸음이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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