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팀이라 좋은 점들에 대해서
기획과 스텝의 어딘가
시작은 한 통의 전화였다. 지금은 다른 계열사에 계신 K과장님은 간단히 본인을 소개하면서 내게 '기획팀'에 대한 업무들을 소개해 주었다. 내 전공이 기획팀에 필요하고, 오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기획팀으로 지원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취준생이었던 나는 기획팀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른 채 한 과장님의 전화 한 통으로 기획팀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당신은 누구세요?"
"네? 전 신입사원인데요? 질문하신 분은 누구신데요??"
재미있는 건 당시 같은 팀이었던 사람들은 내가 입사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나의 Task Leader 역시 내가 누군지 모르고, 나 역시 그분이 옆팀 재미있는 아저씨인 줄 알고 며칠간 지냈다. 그 정도로 모두들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들락날락 거리는 사람들도 참 많았다. 액면가로 못해도 45살 이상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람들은 팀장님들이나 실장님들, 임원분들이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만 만나다가 갑자기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이 팀장, 실장, 임원분들로 확 올라가니까...... 개인적으론 재미있었던 것 같다.
기획팀에 신입사원을 뽑는 건 아주아주 드문 경우여서 그런지 모든 사람들이 반겨주었다. 옆팀 아저씨인 줄 알았던 Task Leader에게 날마다 혼났지만 인간적으로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나 역시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겐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면서 보답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기획팀 라이프는 시작하였고, 지속되고 있다.
겉으로 보는 기획팀, 실제 기획팀원이 느끼는 기획팀
겉으로 보는 기획팀은 뭐하는 팀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정신없어 보인다. 뭐 총무 같은 업무도 하는 것 같고 신문에서만 보는 임원들과 자주 대화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방모찌인가 싶을 정도로 계속 옆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임원께 소신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게 겉으로 보이는 기획팀이라면 안에 깊숙이 들여다보니 더 다이내믹한 일들이 숨어 있었다.
운영과 전략, 모든 것을 다 한다는 아이러니
크게 기획팀 업무를 2축으로 나눈다면 운영과 기획이다. 운영은 온갖 다양한 살림살이부터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의전 등 애매한 업무의 총칭이다. 기획 업무는 임원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제시해주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한다면 운영 업무는 임원의 손과 발이 된다는 의미이고, 기획 업무는 함께 뇌 혹은 CPU가 된다는 의미이다.
수년간 기획팀에 있으면 기획팀원들의 고충과 퇴사 원인들을 많이 듣게 된다. 바로 그 1순위가 '운영 업무'에 대한 피로감이다. 기계가 처리해도 충분한 취합 업무를 왜 내가 하고 있는 거지?, 단순 엑셀 숫자 입력을 왜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이 팀에서 버티기 힘들어진다. 예산을 얼마나 사용하고 있는지, 어떤 계정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이렇게 세세하게 운영하는 측면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이와 맞지 않는 사람들은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운영 업무의 종류는 참 다양하다. 보안 관리부터 시작해서 레이아웃, 포상업무 등 하나의 연구소를 챙기는 애매한 업무들이 포함된다. 그야말로 한 연구소의 살림살이를 모두 챙기는 일들이다. 판돌이 업무도 빠질 수 없는 기획팀의 일이다. 판돌이 업무란 한 사람은 자료를 띄워놓고 어르신들이 이거 고쳐라, 저거 고쳐라 하면 ppt를 띄운 사람은 정신없이 자료를 수정하는 업무를 의미한다. 사람에 따라 아주 잘 맞는 사람도 있고, 운영 업무와 상극인 사람도 존재한다.
전략 업무는 중장기 방향성 점검, 핵심과제 선정, 사업계획 등등이 있을 수 있다. 임원과 같은 레벨로 고민을 하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고민을 하는 역할이다. 한마디로 골치는 아프지만 그만큼 깊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잘 맞을 수 있는 업무이기도 하다.
운영과 기획을 모두 한다는 건 하나라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운영 업무가 정말 기획/전략을 하는데 그렇게까지 영향을 주는가?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나 역시 꽤 오랫동안 기획팀에 근무를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결론은 '영향을 준다.'이다. 기가 막히게 맛있는 돈가스를 먹고 싶을 때 돈가스 전문점을 가지 김밥천국을 가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럼 기획팀에 있으면서 선택을 해야 한다.
나는 어떤 기획팀원이 되고 싶은 건가.
운영 업무를 없앨 순 없다. 그리고 그게 영향을 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런 환경을 이해하고 나의 커리어를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말도 안 되게 순도 100% 기획가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현실과 괴리가 생겨 금방 지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나는 운영 업무보다 본연의 기획 업무에 중점을 두고 싶다. 하지만 기획팀의 특성상 스텝 업무, 공통업무를 해야만 한다면 어떻게 하든 하기 싫은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오랜 시간의 누적으로 단순 공통업무는 약간 휴식처럼 가벼워졌다. 입사 초 회의록 쓰는 일은 지독히도 스트레스였지만 솔직히 요즘에는 회의록 쓰는 게 가장 단순한 노동처럼 느껴진다. 가끔 나보다 더 잘 쓴 팀장님의 회의록을 보면 난 아직도 멀었구나...라는 생각을 하지만 회의록 쓰는 공통업무는 아주 가볍게 느껴진다. 여전히 판돌이 업무는 짜증 나긴 하지만, 100% 내 마음에 드는 업무를 한다는 건 CEO 말고는 없으려니,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계속 발전하는 '기획' 팀원이 되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기획 팀원'은 새로운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가는 팀원이라고 생각한다. 새롭게 제안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왕이면 여러 가지 기술들을 융합해서 뭔가를 만들 수 있는 그런 기획팀원이 되고 싶다. 2022년에는 비록 깨지더라도 계속 제안할 수 있는 기획팀원이 되야겠다고 다짐하는 하루이다.
그럼 기획팀에 있어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
먼저 리더분들께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임원들과 실장, 팀장님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건 안 좋기도 하지만 좋은 점이 더 많다. 직급이 높다고 다 훌륭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목표 대비 성취하려는 의식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에 대한 태도가 남다르다. 때론 너무 피곤해서 체력적으로 힘들 때도 많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프로젝트들을 함께 하면서 성장하는 부분도 크다. 우린 전무님 직속 팀이기도 하니까 전무님의 생각을 많이 듣게 되는데, 한 번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기획팀의 자료가 표준이 될 생각으로 해야 해."
내가 만든 자료, 내가 하는 일이 표준이 될 생각으로 업무를 해야 한다. 그 말씀 한마디가 참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았다. 그때도 일개 판돌이 었지만 판돌이를 하면서 임원진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듣고 배울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큰 판을 볼 수밖에 없다
팀장님은 늘 내게 CTO의 눈높이를 강조하신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고민해보라고 하신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큰 판을 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는 건 쉽지 않지만 적어도 계속 노력을 하다 보면 이 회사에서 뭐를 중점적으로 강조하려고 하는지 맥락을 읽게 된다.
양질의 자료를 수도 없이 자주 보게 된다. 경영자들과 동일한 눈높이가 돼야 하다 보니 경영자들이 볼 수 있는 자료들을 똑같이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귀중한 자료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공부가 된다.
엄청나게 일하거나 반대로 엄청나게 놀 수 있다.
위에서 기획팀은 운영/기획 업무를 같이 한다고 이야기하였는데 그걸 다 잘하려면 일 할게 많아진다. 뷔페같이 찾아보면 일할게 널려있어서 워커홀릭한테는 최상의 조건이다. 일을 하려고 하면 무궁무진하게 배울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 그런 업무들은 시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 발굴해서 할 때 엄청 많아진다. 이게 다시 이야기하면 엄청나게 놀 수도 있는 구조이다. 시키는 사람이 없으니 안 시키면 요양원에 있다고 생각하고 한없이 놀 수도 있다.
나는 뼈가 부스러지도록 일도 해보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놀기도 해봤는데... 결론은 그래도 회사에선 일하는 게 스스로에게 떳떳해지는 것 같다.
그 밖에도 좋은 점들은 많다. 내 경우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결정적으로 팀 리더 운이 많이 따라줬었다. 동료도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거나 성격파탄자가 없어서 열심히 업무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 3개월 이상 근무한 적이 없는 내가 한 팀에서 근무를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잘 맞았다는 소리인 것 같기도 하다. 기획팀에 신입사원 때부터 지금까지 10년간 있었다는 게 자랑인 건지, 고여 있다는 건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볼 시간이 된 것 같다. 나한테 기획팀은 어떤 존재였고, 일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연말이 되어 조용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내년이 되면 좀 더 성숙하고, 생각이 깊은 기획팀원으로 거듭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