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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기획자 Oct 22. 2019

스페인이 부랑자를 대하는 법

지식과 예술의 대중화는 삶을 어떻게 바꾸는가

오줌 냄새, 매춘부, 거렁뱅이, 도난이 비일비재했던 장소가 있다. 

예술의 도시 바르셀로나에 있는 거리라고 하면 말도 안 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 거리는 바르셀로나의 숨기고 싶은 치부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된 거리이기도 하다.      


절대 그 거리에 여자 혼자 가면 안돼
     


바르셀로나에 20년 이상 살고 있는 다니엘 언니는 그 거리, '라발 지구'에 간다고 하면 늘 가방을 붙잡고 말리기 시작한다. 그럴 만도 한 게 몇 년 전 보른 지구에 가면 대낮인데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을 3분마다 한 번씩 마주칠 정도이고 걸쭉하게 가래침을 뱉는 소리를 쉴 새 없이 들었을 정도로 더럽고 위험한 분위기였다. 밤에는 매춘부들이 요란한 의상으로 사람들을 붙잡는 풍경을 바라보며 잰걸음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바르셀로나'를 그리는 수많은 여행 잡지를 떠올리면 피카소, 가우디가 살아 숨 쉬는 도시, 예술과 낭만이 넘치는 도시라고 소개하건만 '라발 지구'의 모습은 낭만은커녕 긴장만이 도사리는 구역이었다. 범죄가 끊이지 않았고 사건 사고가 일상이었다.      


라발 지구에 있는 바르셀로나의 자존심, 현대미술관 :)


바르셀로나 정부에게도 ‘라발 지구’는 치부였고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였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르셀로나 정부의 방향이다. 막무가내로 문제가 생긴 곳에 경찰을 투입해 사건을 수습하기 급급하기보단 과감한 투자로 공공 도서관과 예술 센터, 미술관을 만든다. 특히 미술관은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규모로 만들어 모두를 놀라게 한다. 마치 달동네에 ‘예술의 전당’을 만드는 격으로 정책을 발표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다.     



라발 지구의 카탈루냐 도서관

그 후로 몇 년 뒤 라발 지구 곳곳에 여러 개의 도서관이 나타난다. 오래된 수도원을 개조하여 도서관을 만들고 성당을 개조하여 도서관을 만든다. 도서관을 떠올리면 종이 냄새, 책의 질감, 정숙한 분위기와 함께 사각사각 연필 소리가 떠오를 텐데 어쩐지 보른 지구의 도서관은 입구부터 오줌 냄새가 진동한다. 반 미치광이가 도서관 입구 옆에서 주저앉은 채 멍하니 땅을 쳐다보고 있는 게 내가 도서관을 가는 것인지 정신병원을 가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이다.      



도서관 안에 들어가 보니 더 가관이다. 텅 빈 공간에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 앉아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 소수의 히피들과 일부 사서가 섞여 있는 풍경이 어색하게 연출되는 게 전혀 안 어울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한 곳에 억지로 구겨 넣은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억지로 만든 공간이라 생각한 채 수년이 지나 이제는 위치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 우연히 그 거리를 걷게 되었다.      




잠시 충전도 할 겸 책도 볼 겸 라발 지구의 도서관을 찾아 들어갔는데 수년 뒤 꽤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도서관의 풍경에 무척 놀랐다. 물론 사람들의 외관은 머리를 감지 않아 냄새를 풍기기도 하였고, 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채 랩을 부르기도 하는 등 전형적인 학자의 느낌은 나지 않았지만 모두가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안방에 들어오듯 편하게 도서관에 와서 책을 뒤적이며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하며 그렇게 편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라발 지구에 있는 산파우 도서관



그들에게 책은 거창한 지식의 경계가 아닌 하나의 친구이자 위안이었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그들 나름대로 해석하여 엄숙하고 딱딱한 공간이라는 선입견을 없애고 즐길 수 있는 장소로 바꾸었다.      

억지로 ‘제발 책 좀 읽으세요’, ‘도서관에 오세요.’라고 외치지 않아도 자연스레 책에 대한 궁금증을 유도하고 있는 풍경도 재미있다. 새빨간색, 노란색으로 색칠된 도서관 팸플릿에는 책에 대한 소개와 짧은 이야기가 적힌 채 입구에 놓여 있다.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팸플릿의 그래픽이 독특해 저절로 손길이 간다. 팸플릿을 읽으면서 책에 대한 관심은 물론 이 팸플릿을 몇 장 기념품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종이 한 장이 매력적이다.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자원인만큼 도난이나 분실에 대한 염려도 클 테지만 과감하게 입구부터 책을 전시하고 있다. 책의 한 부분을 펼친 채 그대로 전시한 구역도 있고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그림책을 한 군데 펼쳐져 올려놓은 곳도 있다. 도난에 대한 염려보단 조금이라도 더 사람들에게 책을 노출하고자 하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왜 바르셀로나 시에서는 예술, 책, 도서관을 이 지역에 전폭적으로 투자한 것일까? 사람들이 책을 편안하게 여기고 가까이하면 할수록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어렴풋이 수년 전 내가 겪었던 라발 지구의 모습과 올해 찾아갔던 라발 지구를 비교할 때 천천히 진행되지만 분명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아주 힘이 들 때 책 속의 한 구절을 읽고 깊은 위안과 공감을 얻는 것처럼 그들 역시 삶이 뜻대로 되지 않고, 피곤할 때 책의 한 구절로 위로와 희망을 얻을 것이다. 문장 속에 담긴 의미에서 감동을 하고 배우고 사색을 하면서 조금씩 행동이 변화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종이 한 장에 쓰인 한 줄의 문장이 지금 당장 돈을 벌어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어 사이의 의미들은 분명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라발 지구의 도서관은 단순히 위험 구역에 도서관 하나 세운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선택된 소수가 아닌 다수에게 익히 생각했던 정책, 사고방식, 문화를 전파했을 때 어떻게 대범하게 뒤집을 수 있을지,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만들 수 있을지 알아볼 수 있는 한 예시이기도 하다. 지식의 대중화는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더 큰 영향력이 만들어 갈지 누구도 예측하기가 어렵다.      



지난달 남편을 데리고 라발 지구를 갔다. 여전히 라발 지구는 이방인이 많고 그라피티가 벽면 한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예술가들이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는 풍경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남편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 같다며 라발 지구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한때의 범죄 지역이 지금의 흥미로운 예술 거리고 바뀐 것이다. 지식의 대중화는 천천히 삶을 변화시키며 우리의 사회를 바꿔나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흩어지는 순간을 기억하고자 기록합니다.

@traveler_jo_

유튜브 채널

* book_j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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