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사람들을 위한 제2의 고향 찾기
서울 생활도 벌써 20년째이다. 오리지널 도시 사람이 아닌 까닭일까? 주말마다 번화한 거리를 떠나 조용한 교외 지역으로 나선다. 매주마다 책의 도시 파주에 가서 한적하게 풍경을 둘러보기도 하고 고향인 평택에 내려가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보기도 한다. 이제 번화한 도시 삶에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여전히 한적한 풍경을 따라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내 마음의 도시들에 훨씬 애착이 간다.
‘프랑크푸르트’라는 대도시는 서울만큼이나 인연이 깊다. 자동차 업무를 담당하면서 서울 4대 모터쇼를 늘 주목하게 되었는데 그중 한 모터쇼가 바로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를 한다. 유럽 경제의 허브이기도 하며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덕분에 일 때문에 여행을 갔다가 환승을 하러 종종 이 도시를 들린다. 모터쇼는 9월에 열리고 유럽 남부는 주로 겨울에 가니 환승을 하기 위해 들리는 시기는 대개 12월이다. 생각해보니 매해 가을, 겨울에는 프랑크푸르트를 들렸던 셈이다. 가을과 겨울의 프랑크푸르트는 가끔은 길을 헤매도 좋을 만큼 낭만적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도시의 풍경은 냉랭하다. 쌀쌀한 날씨에 금방 날이 어두워지는 데다 네모 반듯한 직사각형의 건축물뿐이다. 차가운 느낌의 네모 반듯한 강철 건물이 가득한 도시는 화려하면서 어떤 도도함이 느껴진다. 사색이라는 여유 대신 빠른 시간 내에 결과물을 도출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어쩌면 내가 도시에서 느끼는 감정 역시 이러한 것들이 아닐까.
다행히 유럽 여행을 갈 때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환승을 하거나 아예 여행지로 잡은 뒤부턴 이 대도시 주변에 나만의 도시를 몇몇 군데 만들어놓게 되었다. 포도밭의 전원도시 ‘바하라흐’라든지, 학문의 도시 ‘마인츠’가 그러하다. 기차를 타고 1~2시간 정도만 가면 쉽게 다다를 수 있어 언제든지 마음이 답답할 때 소도시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깍쟁이’ 같은 도시 분위기에 경직된 마음은 늘 나만의 도시에서 훨훨 날려 버릴 수 있다.
대성당이나 고대 로마 시대의 목욕탕 터전, 신전 같은 것은 없다. 흔한 유적지 하나 없는 대신 온통 포도밭만 가득하다. 도시는 라인강을 끼고 있어 포도밭, 강변 풍경이 전부이다. 마을 주민들은 포도밭 구릉에 올라가 포도를 수확하거나 잡풀을 뽑으며 농사를 짓고 있다. 볼 것이라곤 온통 포도밭뿐이고 사람들은 단지 포도를 건넬 뿐이었다. 미소를 건네거나 인사를 한다.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다.'
도시의 긴장감이 서서히 사라질 무렵 어떤 포근한 평온함이 느껴진다. 이 분위기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건만 가장 찍고 싶은 것은 가장 찍을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꽉 막혔던 마음에 숨통이 터지는 기분, 평온한 분위기,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 모두를 고스란히 기록하고 싶지만 감정은 쉽게 옮겨지지 않는다. 구릉을 천천히 올라가며 구경하니 ‘포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대신 정지된 것만 같은 시간 속에 높은 곳에서 아래를 쳐다보았을 때만 가능한 강변과 도시의 풍경, 싱그러운 포도향이 어우러진다.
포도밭 구경을 마치고 구릉 아래로 내려가 보니 볼거리 하나 없다고 생각한 도시에 60-70대 할머니, 할아버지의 단체 관광객들이 모여있다. 6명 정도의 그룹이고 분명 백발의 사람들이었지만 표정만은 소풍 가는 초등학생들처럼 밝다. 이 사람들만 온 줄 알았더니 조금 도시를 걸으니 또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의 단체 관광객들이 보이고 이어서 다른 관광객들이 보인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것을 보면 혹시 어마어마한 유적지가 있는데 놓친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혹시 이 도시에 유적지가 있나요? 이 도시를 찾는 사람들이 많네요.”
“글쎄요, 이게 전부인데. 도시가 편안하니까요.”
소박한 카페에 들어가 카페 아주머니에게 여쭤보았더니 아주머니는 유적지의 이름 대신 ‘편안함’이라는 단어를 내게 들려주었다. 아주머니의 말처럼 대단한 유적지는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명 오늘 참 본 것이 많다는 걸 새삼 느낀다. ‘푸른 하늘’도 오랜만에 보았고 ‘초록빛 자연’, ‘유유히 흐르는 강’, 그리고 ‘사람의 따스한 미소’까지도. 문득 내가 오후 2시에 푸른 하늘을 이렇게 두 눈으로 쳐다본 지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도시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싶어 진다.
회사에서도 예전에는 여성이 아이를 출산하고 몸을 챙기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육아 휴직’을 이제 ‘양육’으로 확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추세이다. 아빠와의 교감을 위해, 초등학생 딸의 적응을 위해 과감히 휴직을 하고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같은 팀 동료를 제주도에 한 달 살기를 하고 왔는데 인생을 돌이켜 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이렇게 점점 주변의 사람들이 현실을 떠나 나만의 도시에서 잠시 정착하거나 쉬다 오는 풍경들이 제법 많아지고 있다.
무엇이 현재 삶의 터전을 잠시 내려놓고 내 마음의 도시, 제2의 나만의 고향으로 이끄는 것일까? 가장 왕성하게 사회생활을 할 때 가장 소중한 감정들을 놓치는 순간이 많아진다. 신입사원 시절 어버이날에는 일을 한답시고 찾아뵙지도 못하고, 체력도 무시한 채 일을 하다 몸살이 나 끙끙 앓았던 적이 기억난다.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주객이 전도된 채 나를 둘러싼 가장 가까운 가족은 무시한 채 앞만 보고 달리는 꼴이 아닌가. 대도시에서의 삶은 아무래도 환경적으로 사람들 간 심리적, 사회적인 부담이 크다. 이렇게 개인이 느끼는 스트레스가 커질수록 나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나만의 고향은 갈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 달 살기, 귀농, 나만의 소도시 찾기는 어떻게 보면 심리적으로 ‘나만의 행복’을 찾기 위한 한걸음이다. ‘정신적인 행복’이 과연 트렌드로 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터전을 발걸음을 옮김으로써 행동하고 있다. 오랫동안 추구하는 주류의 가치 아랫사람, 사회, 문화가 함께 소통하며 다양한 변화 양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과 가치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진화해 나갈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 흩어지는 순간을 기억하고자 기록합니다.
* book_j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