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_버려진 공간에 숨을 불어넣기
얼마 전 남편과 강화도를 여행하다 한 카페에 들리게 되었다. 겉보기엔 70년대 한 공장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70년대 여공들이 하얀 모자를 쓰고 손이 안 보일 정도로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은 공장치곤 조명이 따뜻했고 무엇보다 그 장소 앞에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어떤 장소인지 궁금해 안에 들어가 보니 카페였다. 공장을 그대로 보전한 채 카페로 재생되어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옛 폐공장과 커피와의 조합은 어색할 것 같지만 음악, 조명, 빈티지한 가구까지 더해 꽤 근사한 조합이었다.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옛 공장’의 책상, 그때 사용한 의자, 시계, 바닥을 카페를 이용하면서 직접 사용해보니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러고 보니 버려진 건축물에 의외의 숨결을 불어넣어 지역의 ‘핫 플레이스’로 거듭나는 경우를 꽤 자주 마주한다.
발렌시아는 ‘빠에야’의 고장이기도 하지만 내겐 ‘바르셀로나’와 헷갈리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가끔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기차에서 들리는 안내 방송을 잘못 들을 때가 있다. 그날도 어김없이 기차 방송에서 ‘바르셀로나’라고 들었건만 내가 내린 역은 ‘발렌시아’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런 식으로 바르셀로나인 줄 알고 발렌시아에 잘못 내린 적이 몇 번 있었다. 마침 다음 일정이 없어 즉흥적으로 이왕 발렌시아에 내린 거, 발렌시아 여행을 제대로 해보기로 했다.
‘빠에야’의 고장 발렌시아는 유럽의 여느 도시처럼 볼거리가 많다. 기원전 138년 로마의 식민도시부터 역사가 시작하니 몇천 년 동안 축적된 유산의 양이 상당하다. 대성당도 있고, 유럽 3대 시장이라는 ‘중앙시장’은 물론 15세기 중세 무역의 중심이 된 비단 거래소 역시 만날 수 있다. 문화유산은 발렌시아 정부 주관으로 바닥에 티끌 하나 없을 정도로 잘 보전이 되고 있다. 하지만 건물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투우장’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유튜브도 없고 드라마도 없는 시대에 투우는 사람들이 무척 즐겨보는 대중 엔터테인먼트였다. 1-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투우사들과 경기용 투우소와는 삶과 죽음을 두고 경기를 펼친다. 목숨 걸고 하는 경기이기에 매 경기마다 진지하고, 아주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래서일까. 피카소, 고야, 헤밍웨이 등 당대의 유명 예술가들은 투우 경기를 즐겨 보며 자신들의 예술 소재로 승화한 경우가 꽤 많다. 시간이 지나 ‘투우’를 단순히 문화로서 이해하기보단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동물보호단체’에선 인간과 동물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경기를 해야 하는지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생명 보호’라는 측면에서 볼 때 ‘투우’가 과연 ‘문화’로 여겨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질문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문제는 오늘날에는 ‘투우’ 말고도 재미있는 게 너무 많다는 점이다. 놀거리도 많고, 볼거리도 많은데 죽고 죽이는 투우를 굳이 사람들은 찾지 않는다. 점점 투우장에 발길을 끊게 된 것이다. 사람이 찾지 않으면 공간은 죽게 된다. 한때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투우장은 그 지역의 애물단지가 되어 버리는 셈이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투우장에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고민을 하다 요즘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공간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예전처럼 똑같이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유지하되 쇼핑도 할 수 있고, 공연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술과 쿵쾅대는 음악까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투우장에 들어가면 어린이들도 이 공간을 거리낌 없이 찾아올 수 있도록 한쪽 구역에선 연극을 한다. 다른 한쪽 깊숙이 들어가면 어른들은 술을 마시며 즐길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어떻게 보면 과거의 역사적인 장소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낯설 수 있다. 마치 석굴암에서 술 마시고 테크노 댄스 공연을 관람하는 기분이라고 할까? 과거 추억의 장소를 이렇게 재구성하니 좀 더 특별한 감성을 전달받게 된다. 전 세계 어디서도 보지 못한 독특한 풍경을 경험하고 있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흥미롭기만 하다.
UX적으로 과거의 콘텐츠를 재구성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단연 'Yes'이다. 요즘 '뉴트로'니 '빈티지'니 이런 단어로 과거의 콘텐츠를 활용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이 트렌드인데 심리학적으로 시각 단서를 통해 처음 경험할 당시의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게 사실이다. 과거 추억의 장소, 콘텐츠를 접하였을 때 1차적으론 정서적인 임팩트를 받아 호감도가 상승한다. 예를 들어 '은하철도 999' 책받침을 보거나 '아이 러브 스쿨'이야기를 꺼낼 때 호기심과 정서적인 호감이 생기는 것은 과거 해당 콘텐츠로부터 받은 긍정적인 정서가 그대로 연결된 것이다. 하지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무언가로 사업화를 할 때, 서비스를 기획할 땐 비즈니스 관점으로 유익하지 못할 확률이 크다.
처음 불러일으킨 정서적 임팩트가 계속 유지되기는커녕 빠른 속도로 흥미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미 본 영화를 다시 보는 확률이 급격히 떨어지듯 실체가 없는 추억 바라기용 콘텐츠를 만들어낼 경우 급격히 호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장소를 재구성하거나 과거의 콘텐츠를 재 서비스할 땐 반드시 의외의 무언가를 함께 서비스해 자극을 지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발렌시아 투우장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찾아 가보니 동그란 원형의 투우장에는 쇼핑도 하고 연극도 하며 온갖 구경할 거리가 넘쳐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의 열기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발렌시아 대성당’보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비단 발렌시아뿐만 아니라 스페인, 유럽 전역에서 옛 공간을 재해석하는 흐름이 보인다. 바르셀로나 에스파냐 역에 있는 아레나 몰도 한때의 투우장을 거대한 쇼핑몰로 탈바꿈해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마드리드에는 한때의 병원을 개조하여 세계적인 현대 미술관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한때의 어떤 장소를 버려두지 않고 제2의 또 다른 장소로 만들어 나가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사와 공감대는 지금도 계속 변화하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 남겨놓아 그 당시의 문화 생활상을 후대에 전해줄 때 있는 그대로를 전해줄 것인지, 이렇게 재해석하여 전해줄지는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 완전히 달라진다. 티끌 하나 손대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전해주는 방법도 좋지만 그저 바라만 보기엔 재미가 없다.
장소와 문화 역시도 사람과 함께 호흡하고 걸어 나가야 사람들이 계속 찾게 되고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고 문화재를 찾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높아질 때야말로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 귀를 기울일 때이다. 공간에 숨을 불어넣는 여러 사례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과거 유적에 어떻게 접목시킬지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재미있는 문화가 생겨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흩어지는 순간을 기억하고자 기록합니다.
* book_j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