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업무를 하며 느낀 진리
UX를 전공해서 입사하자마자 UX 관련 업무를 할 줄 알았지만 입사하자마자 내게 주어진 업무는 기술 기획에 대한 업무였다. 팀을 변경해야 할까, 회사를 바꿔야 하나 고민을 한동안 많이 하였다. 이런 고민들이 눈에 보였는지 늘 기획 업무의 표본이자 많이 가르쳐주셨던 과장님께선 지금의 팀에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주시고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 그러던 와중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맞다면 가장 잘할 수 있는 업무로서 사람들을 설득해보라며 어떤 프로젝트 하나를 소개해 주셨다. 과장님의 배려 덕분에 다른 팀에 있는 개발자 4명과 인턴사원, 내가 포함되어 본격적인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작은 아이디어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흥미로웠고 다행히 함께 작업을 하는 인턴사원, 개발자 분들과 호흡이 잘 맞아 온통 머릿속에 해당 프로젝트 생각으로 가득 찰 정도로 집중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의욕이 무척 충만해서 휴일이나 명절도 반납한 채 프로젝트에 몰입했다. 가끔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아파왔지만 그래도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을 최대한 녹아 넣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재미있게 기획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일주일간 기획서를 탄탄히 준비하며 의기양양하게 발표를 하면 사람들이 모두 놀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막상 기획한 내용을 발표하니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거센 비판을 받았다. 솔루션을 발굴하는 데까진 오랜 고민이 필요하지만 그에 비해 평가의 영역은 냉정하리만큼 단순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너무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기획이라 마음이 아팠지만 누구든 본인만의 관점이 있으니 서비스에 대한 문제점을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다만 사람마다 생각하는 관점이 달라 기획을 할 때마다 상반된 관점으로 비판을 받으면서 초기의 기획이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쓰레기 같은 기획인데요?"
나를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상황은 해결을 하려는 대화보다는 개인적인 평가가 섞인 비판을 할 때였다. 이럴 때면 내가 재능이 없는 것일까?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정하게 웃으면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지만 쉽게 문제점을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널려 있는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평정심을 붙잡고 있는 수밖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고민한 것이 맞는지 의심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생각해보되 초기의 기획 방향이 맞는지 다시 한번 점검을 하며 다시 원점부터 고민을 시작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만들었던 기획안이 정말 쓰레기였는지 아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이 세상 어떠한 기획안도 모든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하는 기획안은 드물기에 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었다면 다른 재미있는 반응이 나왔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쓰레기든 좋은 기획안이든 다시 보완하고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애착이 있는 기획일수록 타인의 평가에 상처를 받기가 쉽지만 그 비판을 너무 마음속에 담아두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그 기획안은 그대로 사장되기가 쉽다.
'뭐 어때서. 점점 보완해 나가면 되지'
더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보완하고 들여다보면 점점 기획안은 나아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비판했던 사람들도 함께 동참시켜 솔루션을 제안해보라고 하면 가끔은 꼭 필요한 의견을 제시할 때가 종종 있다. 불평꾼과 비판자 역시 공동의 프로젝트로 함께하여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기획안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누구나 비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기획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너무 가슴속에 담아두지 않고 지나가는 일련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누가 뭐라 해도 가장 오랫동안 그 기획안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은 '나'자신이고 함께 기획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돌이켜보면 성공적인 기획안은 단순히 초기의 열정이나 즉흥적이고 괜찮은 아이디어로 바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초기의 열정과 에너지보단 끝없는 비판과 어려움 속에서도 일관되고 지속적인 자세로 프로젝트를 계속 들여다보며 빚어 나갈 수 있는 끈기가 때론 더 큰 빛을 볼 때가 많다. 하나의 기획안이 갑자기 실현된다기 보단 끊임없는 비판 속에서 지치지 않고 보완하고 버텨나가며 일관성 있는 한걸음을 내딛을 때 비로소 마지막 여정인 실현에 다다르게 된다.
일관성 있는 마음으로 기획을 하기란 쉽지 않지만 일관되고 지속적인 태도로 기획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기획안을 들여다본다면 주어지는 선물이 많다. 먼저 한결같은 태도를 통해 콘텐츠의 전문성과 쌓이는 콘텐츠의 양이 무척 커진다. 내가 기획한 것은 반드시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으로 어떤 비판에도 계속 보완해 자나면 결국 해당 분야에 대해선 지식과 콘텐츠가 쌓이면서 점점 기획의 완성도가 올라가게 된다. 기획안뿐만 아니라 개인의 전문성 역시 함께 얻게 된다. 무엇보다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면 프로젝트가 성숙하고 보완되어가며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기획자는 사람들의 생각을 리딩 하는 사람들이다. 일관되고 지속적인 자세로 기획을 조금씩 보완해 나갈 때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맡은 기획안을 일관되게 지속할 수 있다는 건 단순히 매너리즘에 빠져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과 다르다.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담아 경영층이 반대를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보완하고 보완하여 타인의 생각을 리딩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기존에 했던 업무를 계속 반복하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해관계자를 직접 만나 문제점을 충분히 듣고 어제와 다른 기획서를 매일같이 업데이트를 해 나가야 한다. 어떤 주제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 없이는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아마 기획자는 오늘도 불특정 다수의 생각을 읽기 위해,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고민할지도 모르겠다. 일관된 자세가 중요하지만 막상 생각한 기획안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면 마치 기획안이 아니라 나 자신이 비판받는 것처럼 마음 아플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획안은 계속 수정해나가면 되니 일관되게 책임만 지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비판과 불안은 점점 조용히 잠재울 수 있다. 의심의 싹이 고개를 들고 사람들의 거센 저항을 마주하면 할수록 지금의 기획을, 콘셉트를 계속 다듬고 또 다듬어 나가자. 일관된 마음으로 조금씩 다듬어 나갈 때 기획안이 무르익는 순간 기획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점점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