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나중에 오는 법
전부 다 내 선택이었다. 누구의 시킴이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내가 스스로 한 결정들이었다. 매 순간 주도적으로 날 이끌며 살지 않았던 것이 나를 잃어온 것과 동의어는 아님을 알 때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밋밋하지만 나쁘지 않은 삶이다. 내가 느끼기에 긴 터널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너지고 짓눌리고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독방은 아니었다. 조금만 움찔해도 떨어질 절벽도 아니었다. 그 시간만 뚝 떼서 보자면 내 존재를 모른 척하고 싶었던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감도 높은 때였다.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인지하며 살 수 있었으니까. 인지를 과하게 했는지 있지도 않은 자신감마저 뚝 떨어지긴 했지만 그건 지금부터라도 채우면 되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련다. 뭐든 한 번은 부작용이 있게 마련이니까.
삶을 대하는 온도가 대부분 무덤덤 미적지근했다. 온도를 높이는 연습이 되어 있지 않다 보니 조금씩 찬기가 도는 쪽으로 내려갔던 것 같다. 36~37°C 체온을 유지하며 면역력을 지키는 방법이 있었는데 선택하지 않았던 건 온도를 높이는 방법을 정말 몰라서였을지도 모른다. 운동을 하고 근육을 늘리고 식단 조절을 하는, 또 휴식을 취하고 잘 자고 햇빛 쏘이고 가끔 치팅데이도 누리는 방법들을 '애써' 찾아야 한다는 것을. 시야가 넓지 않아서 보이는 부분에서만 결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를 잃었다고 봤던 게 아닐까 싶다.
그 온도는 '굳이', '기어이', '구태여'라는 언어를 갖고 살아가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짐작해 본다. 귀찮고 번거롭다고 지나칠 것인지 혹은 감내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 내 경우 후하게 인심 쓰면 양쪽 다 속한다. 나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하는 시간을 그냥 넘겼고 나름대로 치열하고 싶었던 건 굳이 견뎠다. 영양가 있는 견딤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실 일부러 애쓰는 단계까지 가지 않아도 살아가기는 한다. 능동적인 형태의 '살아감'이 아닐 뿐이지 살아진다. 다만 괴로워지곤 한다. 살아짐에 의한 영향이 '겨우', '이것밖에'로 다다르기 때문에.
아마 그때도 지금만큼이나 적절한 온도 찾기가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겪은 모든 것들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뭔지 모를 원망을 하고 방황하며 발버둥쳤을 것이다. 미흡함을 먼저 쌓아서 단단해지려고. 뒤에 오는 충분함을 감사히 여겨 욕심부리지 않으려고. 어쨌든 세상의 잣대보다 스스로에게 겨눈 칼날이 날카로웠단 것을 알았으니 됐다. 이젠 살아감 속에 녹아들면 된다. 물론 이 또한 분수에 넘치게 탐을 내는 것일 수 있다. 그럼 또 알아차리면 된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