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

나 자신의 통제가 필요한 일

by 가람

‘약속’하면 이때를 잊을 수가 없다. 아홉 살 때였다. 이름이 같아 친해진 단짝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가 어느 날 집으로 찾아와 하는 말이, “나 이사 가”였다. 마음이 잘 맞아 하하호호 일상을 같이 하던 친구였는데 너무 아쉬웠다. 감정이 채 올라오기도 전 친구는 말을 이었다. 이사 가기 전날에 나를 다시 한 번 더 만나러 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래 알았어” 꼭 만나려는 굳은 마음을 말로 내뱉고 약속 당일이 되었다.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학교 같은 반 친구가 다니는 성당 행사를 따라갔다. 성당에서 성가대로 노래를 부른다고 하기에. 친구의 노래를 듣고자 시간을 보며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늦어져 약속 시간 전에 친구 노래를 듣지 못할 것 같았다. 듣지 못할 것이 점점 확실해졌다. 친구 노래 듣기 전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집으로 출발했어야 했다. 그랬어야만 했다. 하지만 친구의 노래가 몹시 듣고 싶었던 나머지 “그래, 바로 다음 순서라고 하니까 듣고 얼른 뛰어가야지”했다.



집으로 뛰어들어가자마자 약속했던 친구의 목소리가 아닌 엄마의 고성이 들렸다. “뭐 하다 이제 들어오는 거야” 곧바로 내가 물었다. “엄마, OO 갔어?” 친구가 기다리고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뛰어왔지만 욕심이었다. “지금이 몇 시인데?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지났어. 엄마가 미안해서 아주 혼났어 이 지지배야(지지배로 순화함)” 그리고는 저쪽 방에 들어가 한 시간 동안 무릎 꿇고 손 들으라고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명백한 내 잘못이었다. 심지어 선약이었으니까.



팔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엄마가 무서운 건 둘째고 그저 친구에게 미안했다. 친구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손을 들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친구 노래를 듣지 말고 왔어야 하는 건데.’ 누군가와의 소중한 약속을 지키는 일은 나 자신의 통제가 아주 필요한 일임을 느꼈다. 누가 고작 그런 이유로 약속을 안 지키는 게 말이 되냐고 묻는다면 맞다. 당연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 그 순간에 나는 노래 부르는 친구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무척 흔들리는 유혹일 만큼.



결국 친구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도 한마디 못한 채 이사 가는 곳 연락처도 받지 못한 채 헤어졌다. '아이고 멍충이...' 한숨을 내쉬고 벽에 머리를 박아도 모자라지만, 눈을 번쩍 떴다. 절대 되풀이하지 말자고. 상대방과의 약속은 물론이고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때도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일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데, 나에게는 그것을 얼마만큼 이겨내느냐가 중요한 싸움이 되었다. 지킬 것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분별할 수 있는 사람. 무엇을 간직하고 명심할 것인지 아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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