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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이 Feb 04. 2024

많은 물건을 버렸다

정리 정돈 속 과거 현재 미래

이제 들어가면 산뜻하게 맞이해주는 우리집


나는 7평 오피스텔에 산다. 작년 12월 많은 물건을 보내주었다. 물건을 ‘버린다’는 표현보다 ‘보내준다’가 더 적합했다. 왜냐하면 어떤 물건들은 꽤 오랜 기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건을 보내주는 건 과거와 불안감으로 붙잡고 있던 미래를 함께 놓아 보내는 작업이었다. 머무는 공간을 채우는 공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가뿐해진 몸과 마음이 온전히 현재로 향하는 문을 열어 주었다.



정리하리라 큰맘 먹고 물건들 앞에 선다. 남기거나 버릴 물건을 구분하기 위해 우선 꺼낸다. 고민 없이 휴지통으로 직행하는 자잘한 물건들이 있다. ’이건 왜 받았지?‘ 싶은 화장품 샘플, 유통기한 지난 과자 등.


그런가 하면 막상 버리려고 하면 한참을 망설이게 되는 물건들이 있다. 이를 테면 이런 물건들이다.


진한 추억이 담긴 물건: 호주에서 사 온 키링(그러나 사용하지 않는), 각종 여행 기념품.

옷: 세 가지 케이스가 있다. 여행지에서 입은 추억이 있는 특별한 옷. 언젠가 입겠지 하고 왠지 안 어울리지만 갖고 있는 옷(대부분 한 계절 지나도록 손도 대지 않는다), 한때 많이 입은 옷이라 추억이 서린 옷(역시 이제는 입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며 스타일이 바뀌어서든, 낡아서든).

열심히 했던 흔적이 있는 물건: 대학 때, 취업준비 할 때 공부했던 책들, 프린트물, 상장들이 있다. 학교를 졸업한 지 4년이나 되었는데 그때 헤질 때까지 넘겨본 프린트물들을 구석에 보관하고 있었다.

언젠가 쓰겠지 라며 남겨둔 물건: 공부하다 만 독일어 회화 책, 여분의 콘센트 어댑터 등. 대개 지금 필요치 않은데도 앞으로 쓸모를 예상하며 필요 이상으로 갖고 있는 물건들이다. 그러나 지난 1-2년간 쓰지 않았다.


이렇듯 어떤 물건들은 위의 이유들로 그동안 ‘더 이상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움켜쥐고’ 있었다. 물건의 쓰임새보다 버릴 수 없다는 이유 자체가 더 커져버린 거다.



시원하리만큼 깨끗해진 현관


넓지 않은 한 칸 크기의 방에서 6년 정도 지냈다. 그동안 물건들을 정리할 시도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정리•정돈‘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살림에도 전혀 취미가 없었다고 과거의 나를 말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집이 막 더러운 건 아니었다. 휴지통이 넘칠 때가 되어야 귀찮아하며 분리수거하러 가고, 바닥에 머리카락을 쓸 때는 ‘와 정말 너무 힘들다..’라며 피곤한 몸과 마음을 불쌍해했다. 살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피곤함 뿐이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는 이 집은 잠자는 곳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직장에 다니면서는 ‘사는 것도 힘든데 집안일까지 잘해야 돼?’라는 생각으로 최소한의 집 정리만 했다. 집에 대한 나의 감정, 태도가 이렇다 보니 거주한 지 6년이 되었는데도 임시거처 같은 느낌만 들었다. 적응은 했지만 정착은 못 한 상태 말이다. 마음 한 켠이 언제나 불안하게 둥둥 떠 다녔다.



그런 내가 작년 12월 작아 보이지만 큰 변화를 맞이했다. 한 달에 걸쳐 많은 물건들을 내보냈다. 처분할지 말지 결정하는 기준은 단 하나였다.


지금 필요한가?


지금 필요한 물건들은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지금 시점에서 행복을 준다.

과거의 영광(이랄 것도 없지만)을 기억하기 위해, 지금 시점 품고 있는 목표와 동떨어진 혹시나를 대비해 갖고 있는 물건이 아니다. 과거에 그 물건은 자신의 역할을 다했을 것이고 이 점에 고마워하면 된다. 그리고 그때 배운 끈기, 열정과 같이 정말 중요한 거라면 물건으로 갖고 있지 않아도 온몸으로 내재화했을 것이다.


2. 본연의 쓰임새를 발휘하고 있다.

사람만 적재적소에 적진가를 발휘하는 게 아니다. 물건 역시 처음 태어날 때 자신의 역할을 갖고 있다. 지금 가진 물건이 그 쓰임을 다하도록 해 주고 있는지 물었다. 그게 아니라면 보내주는 게 물건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 물건은 과거 어느 때에 자신의 역할을 이미 다 했다. 혹은 적어도 내게는 필요치 않아 전혀 쓰임을 발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보내주면 된다.


이렇듯 지금 필요한 것들로 나의 공간을 채우는 작업을 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종량제 봉투를 몇 장이나 쓸 정도로 버릴 물건이 많았다. 작은 집에 쓰이지 않는 물건들을 이렇게 많이 갖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솔직히는 물건들을 버리면서 ‘붙잡고 있던 과거에 질식할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아가려는 나를 무겁게 짓누른 건 과거와 미래를 위한 물건들이었다. 과거를 물건으로 붙잡아 둠으로써 고이게 했으며, 미래는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부족해 잡다한 물건들로 대비하고 있었다.


이렇듯 물건을 버리는 게 아니라 이제 내보내 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니 처분을 위한 구분이 한결 수월해졌다. 나는 더 이상 4년간 고이 보관해 둔 그 프린트물을 펼쳐 공부할 학생이 아니다. 또한 추억이 있어서, 언젠가 입을 것 같아서 옷장 한켠에 개어 둔 옷보다 지금 손이 가는, 더 잘 어울리는 옷들을 입는다.


과거에 역할을 다 해 준 물건과 옷들에는 고마워한 다음 보내준다. 지금 전혀 쓰지 않지만 혹시 하며 필요 이상으로 가진 물건들도 보내준다. 미래에 필요하다면 그때 들어와 줄 테니 말이다.



글을 마치며.


이제 나는 정리•정돈을 하나의 ‘보내주고 들여오는’ 흐름으로 여긴다. 마치 깨끗한 시냇가가 흐르듯 말이다. 고임 없이 물이 흐르는 자리를 새롭게, 지속적으로 채우며 흘러간다.


우리가 사는 공간을 채우는 물건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맞이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나는 채우고 움켜쥘 줄만 알았지, 물건이 쓰임을 다했을 때 흘려보낼 줄 몰랐다. 보내주지 못하고 있는 물건들은 과거를 붙잡는 수단으로 전락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화장대 서랍, 신발장, 냉장고 등 작은 구역들을 틈틈이 정리하고 있다. 물건들을 보내주는 만큼 공간이 확보된다. 공간을 채우는 공기가 가벼워진다. 지내는 공간이 발산하는 공기가 달라진 만큼 내 몸과 마음도 가뿐해진다. 비로소 현재의 내가 머무는 공간이 되어 준다.


정리는 더 나아지고 싶은 우리의 삶에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깨끗하게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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