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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uze Sep 02. 2019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는 <일>이란...

133명이 털어놓는 일에 대한 애증

일을 하지 않는 시기에는 오히려 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쪼갤 수 있는 작은 단위가 아니라 '나에게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덩어리가 큰 질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백수라서 시간이 많은 것도 그렇지만 각종 구직공고나 자격증 정보 등을 뒤적이며 다음 행보를 걱정하다 보면 저절로 이노무 일이 나한테 맞기나 한가 근본적 고민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면 일이나 노동의 본성을 다룬 책들을 즐겨 읽는다. 물론 답은 없다.


<일>이라는 간단명료한 제목을 가진 이 책은(그래서 검색에 잘 안 걸린다. 저자나 부제, 출판사 등과 함께 검색하길 권한다) 그중에서도 나한테는 늘 최고인 책이다. 1970년대 중반 라디오쇼 진행자이며 작가인 스터즈 터클이 133명에 달하는 갖가지 직업을 지닌 사람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재구성한 책으로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만 모두들 하기 싫어하고 아무나 하지 못하는'이라는 재치 있는 부제를 달고 있다. 분량이 무려 880페이지에 달하지만 직업 성매매 여성부터 경찰, 자동차 공장 노동자부터 주부, CEO와 교수에 이르는 각계각층 사람들이 자신의 일이 지닌 지겹고 힘들며 끔찍스러운 면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걸 듣다 보면(구술사라서 입말체로 되어 있음) 어느덧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게 된다.


십여 년 전인가. 난 대학 졸업 후 계속해 왔던 일에 대한 슬럼프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적성에 맞아서 시작했고, 이후로는 대인관계, 문화취향, 화법 심지어 성격까지 모든 것을 관장하게 된 나의 사랑하는 직업에 대한 회의가 어느덧 찾아들었다. 이렇게 많이 왔는데 갑자기 '이 길이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세월 달려왔던 내 인생을 백지상태로 돌려 통째로 부인하는 격이 될지도 모르니. 이 책 <일>을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보자마자 구입해서 읽었던 건 정말 알고 싶어서였다.


내 정체성까지 영향을 미치는 직업, 나아가 일에 대한 이 심상치 않은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건지, 그리고 그런 감정이 있다면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고 싶었다. 이 느낌을 덮고 그냥 아무 일 없었던 듯 가는 것이 너 나할 것 없이 제 밥벌이를 하지 않으면 인간 대접을 못 받는 이 사회에서 당연히 선택해야 할 어른스러운 길인지 알고 싶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컴컴한 새벽, 따뜻한 잠자리에서 일어나 직장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스러워 죽을 것만 같은 감정이 나만의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업무 상의 크고 작은 스트레스, 나와는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 늘 반복되는 회사 안의 자질구레한 관행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지겨워서 탈출하고픈 생각이 드는 것이 과연 정상인지 물어보고 싶었단 말이다.


그리하여 집어든 이 긴 책을 다 은 후 나는 이 사람들이 '일은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30여 년 같은 슈퍼마켓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여인은 물건을 보면 저절로 가격표가 떠오른다며 자랑스러워하고, 한 웨이트리스는 쩨쩨하게 어물거리는 손님에게 '네 팁 따윈 필요 없어!'라고 일갈한다고 털어놓는다. 여덟 시간을 연달아 열기 가득한 공장에서 가죽 가방을 만들면서 고작 20분 주어진 점심시간에 밥도 먹고 화장실에도 가야 하는 한 여성 노동자는 자투리 시간에 노동조합 일을 한다. 그러면서 가족이나 일 얘기를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에만 관심을 보이는 동료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일이라도 사람들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없다면 적어도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정을 붙이던가 아니면 일로 인해 파생되는 그 무엇인가에 몰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적어도 일은 사회와 소통하는 통로 구실을 하기 때문에 밥벌이 이상의 가능성을 인간에게 열어준다는 결론. 이 책 말미에 실린 옮긴이 글에 인용된 미국의 정치학자 마셜 버먼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는 미국에서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봉기를 일으키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봉기를 일으키는 대신, 자신의 모든 지적 능력과 감수성을 사용해 자기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노동을 아름다움과 환희로 물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갑의 계략에 놀아나는 을의 자기 위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적지 않은 시간을 일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면 정을 못 붙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 중 가장 불행한 축에 들 한 대형 빌딩 접수계원의 독백은 이러하다. "요즘에도 아침이면 울음을 터뜨려요. 일어나고 싶지 않았어요. 금요일이 두려웠어요. 월요일이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또다시 닷새를 일해야 하니까요. 끝이 없는 것 같았어요. 제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다른 직업을 찾기가 두려워요. 신청서를 쓰고 테스트받는 게 싫어요." 그녀는 이어서 처량하게 말한다. "제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요. 이게 가장 괴로워요. 이 일을 그만 두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저한테 어떤 재능이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학교 교육을 너무 오래 받은 탓에 제 재능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녀와 비교한다면 목수이자 시인인 닉 린지라는 사람의 고백은 부럽기까지 하다. "8펜스짜리 아연 도금한 끝막음못을 널빤지에 박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자신의 온 세상이 이 못의 대가리에 실리는 겁니다. 망치를 한번 내리칠 때마다 존재 이유를 느끼는 거죠. 이런 생각이 듭니다. '좋아, 못 박기 대충 끝내버리고 다른 중요한 일을 하지는 않을 거야.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 그리고 망치소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은 못을 박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려칠 뿐입니다. 정확하게, 똑바로 내려치는 데 신경을 집중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요. 한 방, 한 방에 말이죠."


얼마를 받든, 어떤 위치에 있든, 사회적 인식이 어떻든 간에 이런 몰입의 순간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찾아온다. 단,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회사가 자신을 착취하는 것, 평생 충성해봐야 말짱 헛 거라는 것, 추위에 이빨을 부딪치며 출근하지 않으면 가족의 생계가 위험하다는 것, 그러나 무엇보다 '돈 때문에 일하는 거야'라며 인상을 구겨 봤자 자신만 불행할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비록 마음속에서 꿈꾸던 것과는 딴판인 일에 매여 있더라도 그 안에서 자그마한 만족이라도 찾아야 함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열 받아봤자 해결책은 안 나니 상황 속에서 열심히 일해 언젠가는 진정으로 꿈꾸던 일을 하리라, 이루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난 괜히 바쁜 사람들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세상의 불행은 다 짊어진 듯 심드렁하게 구는 일은 그만두었다. 표를 안 낼뿐 그들은 나보다 더 철들고 현명한 사람들이니까. 쉬고 싶을 때 쉬고, 마음껏 자고, 여행이나 다니는 백수 노릇이 체질에 제일 잘 맞을 거란 생각도 집어치웠다.(알고 보니 내가 등장인물 중에서도 정도가 심한 워커홀릭들과 생각이 비슷했다.) 일=직장이란 이분법에서 놓여나 감정과 체력 소모가 심했던 직업에서 떠나 다른 분야로 옮겼고, 이제는 '백수 시기는 나를 위해 일하는 때'라는 꽤 정교한 정신승리의 경지에 이르렀다. 아직까지 번민은 많지만 적어도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알고 있고, 계속하고 싶은 일이 늘어날 거라는 건 다행으로 생각한다. 일을 할 만한 신체적, 감정적 에너지가 조금은 남아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다.


다만 정말 로또 당첨이 된다든지 해서 일을 완전 안 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장담할 수는 없는데...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이 책은 그런 행운을 맞은 이들에게는 별 효용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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