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함정
그냥 하고 있는 것만으로 괜찮은 핑계가 되어버리는...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주기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 매일은 무리래도 일주일에 두 개씩은 올리겠다는 결심은 이미 멀어진 지 오래. 몇 달 전부터 자격증 공부를 하나 시작했는데 이게 은근히 신경 쓰이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라고 말해보지만 사실 정신만 좀 차리면 다 별 지장 없이 할 수 있는데 게을러서 그렇다고 자학중.
그나마 수확을 얻은 게 있다면 취준과 공부의 위험천만한 상관관계를 깨닫게 된 것 정도일까. 일단 시작하고 나니 공부란 게 나 같은 백수한테는 그럴듯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노력하고 있으니 괜찮아' '이거라도 하고 있으니 뭐라도 될 거야' '오늘 이 정도 했으니 최선을 다 한 거야' 같은 류의 혼잣말이 쉴 새 없이 들리면서 자기합리화는 물론 심지어 성취감까지 느껴지더라는 것.
내가 하고 있는 건 국가가 지정한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에서 인터넷 강의로 필요 학점을 딴 뒤 신청하면 나오는 자격증인데 이렇게 말하니까 간단한 것 같지만 일정 점수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관리를 좀 해야 한다. 강의는 대체로 14~15주 코스이고 한 코스당 2주 기한으로 오픈된다. 기간 안에 수업을 듣지 않으면 결석 처리된다. 오픈북으로 치는 중간, 기말고사가 있고 수강자들이 각자 특정 주제에 대한 의견을 올리고 서로 코멘트하게 하는 온라인 토론도 정해진 기간 오픈된다. 이 토론을 비롯한 각종 게시판에 글 올리는 것도 참여점수로 포함된다. 과목마다 리포트 과제도 있다.
인강은 대충 틀어놓으면 되고, 오픈북 시험이니 쉽겠다고? 한 주차 수업이 대충 90분 분량(30분 정도씩 세 개로 쪼개져 있다)인데 듣고 나면 매주나 격주 또 퀴즈가 있다. 오픈북이라도 총 50~60분에 주객관식이 혼합된 25~30개 문제를 다 찾아서 쓰려면 뭐가 어디 있는지는 대충 알아야 한다. 보통 다들 한 번에 7과목 정도는 듣는 모양이니 2주마다 600분이 넘는 인강을 꼬박꼬박 듣고 15주 안에 토론, 과제, 시험을 보고 경우에 따라서는 120~160시간에 달하는 관련 기관 실습도 해야 한다. 실습의 경우 1일 8시간, 주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빨리 잡아도 4주는 소요된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온라인 수강해 학사학위나 각종 자격증을 딸 수 있게 한 학점은행제의 특성상 40대에서 많으면 60대까지 직장인, 전업주부, 은퇴자들이 많아서 일단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다가 다들 한 번씩 멘붕을 겪는다. 4년제 대학 학사 학위를 온라인으로 따는 독학사 과정의 경우 자격증과 연계하면 거의 30학점, 4학기 정도를 듣는 장기전이라 온라인 상에 눈물 나는 사연이 넘쳐난다.(대학 안 간다는 청소년이 있다면 보여주고 싶을 정도). 이런 틈새를 파고든 것이 관련 네이버 카페들이나 프리랜서 학습 '플래너'들.
온라인 강의들이 한번 개발되면 업데이트가 쉽지 않아 토론, 리포트 주제가 몇 년째 거의 같기 때문에 관련 카페들은 일정 개수의 게시물, 댓글을 올리면 준회원에서 정회원으로 승격시켜 주고 1회 한정으로 관련 자료를 무료로 준다고 홍보한다. 온라인에 떠돌고 있는 걸 보아하니 교재를 베낀 듯 임팩트도 없는 몇 줄 글이지만, 그래도 감도 못 잡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격이다.
이런 카페에서 더 바람직하게 여기는 건 아예 돈을 내고 수강생으로 등록해서 담당 플래너와 1:1 진행하는 것. 물론 국가가 지정한 평생교육기관이나 평생교육원들(학교 부설, 민간 등 다양함)도 1:1 상담을 강조하긴 하지만 적어도 답까지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수강생으로 등록하지 않아 예상 시험문제까지 가르쳐 주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넘겨받은 리포트 기초로 써서 모사율 테스트했더니 60%가 넘게 나오더라, 처음 등록할 때는 친절하더니 요새는 연락도 없고 전화하면 반응이 쎄하다 등 불만도 있는 걸로 봐서 역시 공부는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게 진리인 듯.
생각보다 만만찮다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수강생들과의 경쟁도 좀 힘겹다. 중간, 기말고사 비중이 높긴 하지만 참여 점수도 있고 어쨌거나 상대평가니까 누군가는 바닥을 깔아줘야 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이분들이 누군가. 콩나물시루 교실에서 '하면 된다'를 급훈으로 삼아 일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는 적자생존, 경쟁심리가 뼛속까지 체화된 연령대가 아닌가. 10% 비중인 참여점수 잘 받겠다고 과목별 자유게시판마다 똑같은 일상 잡담을 하루에 몇 번씩 돌아가며 도배하는 건 물론, 마감 기한도 되기 전에 과제 다 제출하고 그걸 또 게시판에 올려 자랑하는 정신승리. 토론 기간에는 다른 사람들 의견에 어찌나 열성적으로 댓글을 달아대는지 마감하고 보니 두 세 사람이 전체 게시물 분량을 양분하는 양상도 보였다. (이런 분들이 부모면 좀 무섭..)
'노오력'하시는 분들 쫓아가다 보니 나도 어느 순간 막 몰입하게 되면서 브런치고 뭐고 다 팽개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좀 허망하긴 하다. 이 자격증이라는 게 딴다고 해서 인생이 확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자격증이 그렇듯 '따두면 좋지' 수준인 데다 이 나이에 따 봤자 또 별로 쓰임새도 없기 때문이다. 이미 관련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기본 갖고 있으며 여염집 장롱에서 썩고 있는 수도 어마어마하다. 이 바닥 파악하느라고 서치하다보니 국가, 민간 가릴 것 없이 자격증만 몇 개씩인 분들도 많더라. 심지어 모 정부부처에 다니는 내 친구 지인은 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내가 지금 하는 자격증을 같이 땄다고 전해 들어 더 주눅이 들었다.
학력도 돈이랑 똑같다. 나보다 잘난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끊임없이 나온다. 그래도 자꾸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한 것은 지금보다 조금만이라도 더 갖춰놓으면 뭐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일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학위나 자격증 같은 건 무의미하다고 국내외 학자들과 기업가들이 이야기하지만(근데 그분들은 다 유명 대학 박사까지 마쳤거나 주커버그나 스티브 잡스처럼 탁월한 자퇴생이라는 게 함정) 2019년 지금도 사람들은 학위나 자격증에 안달하면서 주입식, 암기식 공부를 한다.
내가 느낀 공부의 함정 중 가장 무서운 건 어느 순간 수동적인 태도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지난 두어 달 여 나는 수업을 듣거나 시험공부를 하는 것보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게 더 어렵게 느껴졌다. 공부는 하라는 대로 하면 되니까 안 힘들다. 들으라는 대로 듣고, 내라는 대로 내고, 쓰라는 대로 쓰면 된다. 반면 글은 스스로 생각해서 뭔가 만들어야 하니까 시간도 많이 걸리고 골치도 아프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하고 싶지 않아졌다. 대신 뭐라도 하고 있으니, 심지어 공부하고 있으니 됐다고 합리화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도 잘 간다.
한 지인의 친척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자녀 넷을 공부시키면서 거액의 학자금 대출 부담을 안게 되었는데 이미 막내까지 20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도 취직한 이가 없는 상황이란다. 지방 대학 입학→서울의 중위권 대학 편입→ 서울의 상위권 대학원 진학. 또는 지방 대학 졸업→서울의 상위권 대학이 외국 교육기관과 합작해 설립한 특수대학원 입학 및 수료. 서울의 중위권 대학 및 대학원 졸업→대기업 시험 준비. 많이 들어본 패턴이다. 그나마 외국 유학은 없어서 다행일까.
이제야 열심히 취준 중이라는 그 청년들에게 왜 공부만 하면서 세상에 나갈 시간을 유예하냐고, 이런저런 학벌을 다 모아봤자 결정적인 한 방에 못 이긴다고, 눈높이 낮춰서 빨리 취직하라고 말하진 못할 것 같다. 나부터도 공부의 함정에 빠져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