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구직 관련 사이트들을 서핑했다.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지, 아님 여름휴가가 끝나고 하반기로 접어들어서 그런지 새로운 정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에는 쉽게 분간할 수 있는 시한폭탄도 있고, 약간 아리송한데 잘못 밟으면 발목 날아갈 것 같은 지뢰도 있다. 물론 나 따위는 엄두도 못 낼 고스펙자들만 갈 수 있거나 또는 적어도 80년대 이후 출생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일터들이 태반이다.
서칭하다 보니 업계의 동향도 가늠이 된다. 나도 익히 그 내막을 알고 있는 같은 업계 어딘가는 또(!) 사람이 나갔는지 긴급 공고를 냈고, 이웃 업계의 또 어딘가는 경력 및 학력 무관(신입을 원할 때 쓰는 표현)이라면서도 경력 7년 차는 되어야 다 쳐낼 수 있을 만큼 자잘하면서도 방대한 업무 내역을 제시해 놓았다. 전체 사업 비전 수립부터 수시 자료 아카이빙, SNS 관리에 행사 시 스태프 도시락 주문까지 해내는 단 한 사람이 필요하단다.
모두 다섯 개 사이트를 훑어봤지만 다이어리에 적어 둔 것은 세 개 정도? 구직 공고가 2개월 단위로 리뉴얼된다고 보면 대충 이 정도 건져 올리면 평타다. 어떻게 그리 되냐고 물어본다면 동년배 기준으로도 심히 별로인 내 스펙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많지도 않은 경력 모집 공고 중 태반을 자격 미달로 날려 버린 후 그나마 솎은 공고를 직감과 눈치로 요리조리 뜯어보다 취사선택을 하면 딱 그 정도 숫자가 남게 된다.
내가 골라내는 공고의 유형은 대략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나이가 든 사람도 써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작은 조직. 조직이 크면 경력과 연령대 별로 촘촘해서 중늙은이가 들어가면 전체 족보가 이상하게 꼬인다. 그런 일을 감수할 만한 큰 조직은 거의 없다. 긱워크가 대세인 시대니 정규직은 바라지 않고 계약직, 기간제, 육아휴직 대체 등 비정규직 위주로 본다.
또 하나는 국가나 지자체가 벌이는 일시적인 큰 사업의 실무자들을 뽑는 프로젝트성 일자리다. 이 경우 내가 이전에 했던 일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아예 없을 수도 있다. 국가유공자, 장애인, 북한이탈주민, 결혼이주여성, 경력단절여성, 기초수급 대상 등등 우대조건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고 일반 참여자 경쟁률도 높아서 선발되긴 쉽지 않다.(물론 그들이 우대받는 것에 대해 불만은 없다) 한 친구는 자동차와 보험회사 콜센터에서 일한 경력을 인정받아서 한 정부부처가 전국 산하 기관에 파견해 민원인들을 상담하게 하는 1년짜리 일을 얻어서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물론 공무원은 당근 아니고, 정규직도 아니고, 이 사업을 아웃소싱 받은 업체와 계약한 프리랜서 신분.
보통 1년이고 짧게는 6개월, 3개월 일자리도 있는데 정부나 시에서 주최하는 영화제나 축제 같이 스펙으로 쓰기 좋은 프로젝트에는 해외 유학에 대학원까지 졸업한 청년들도 많이 온다. 문제는 대부분의 중단기 사업을 이런 인력으로 채우면서 정규직 일자리를 줄이고 계속 청년들의 커리어를 단절시키고 있다는 것. 예전에 면접서류를 검토할 때면 이런 이력서가 정말 많았다. 20대 중반인데 두 장이 넘어갈 만큼 경력이 길어서 가만 뜯어봤더니 모두 3개월, 4개월, 길어야 6개월 정도의 프로젝트에 단기 인력으로 일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또 환장하는 건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이런 걸 경력으로 안 친다. 적어도 4대 보험 기록은 있어야 경력증명으로 받아주기 때문에 이런 청년들은 결국 나이만 먹게 되는 셈. 이런 상황이니 드물게 영접하는 정규직 자리는 청년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오십대 취준생이 되면 이전에 고민했던 것들 중 많은 부분이 없어지거나 또는 달라진다. 브런치에서는 '퇴사 통보를 언제 해야 할지 두근두근'한다던가 '퇴사 통보를 하고 말았다'는 글이 많이 올라오는데 오십대에게는 이벤트 축에도 안 든다. 퇴사한다고 하면 바로 패스. 전사 차원에서 서류 정리부터 인수인계, 환송 회식까지 신속히 도와준다. 퇴사 콘텐츠와 함께 브런치 주제의 쌍벽을 이루는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고 싶어요'라는 고민도 나로서는 큰 의미가 없는데, 이건 좀 감사할 일이다. 일단 그나마 다른 일보다는 낫게 하는 분야의 일로 돈을 벌어왔고, 심지어 노는 거보다는 일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사실입니다.ㅠ) 무엇보다 싫어하는 일이지만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기엔 너무 오래 했다. 이 정도면 좋아하는 게 맞는 거다.
요새 고민의 지점은 다른 곳에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일이 나의 것이냐'하는 것. 내 것이라는 게 뭐 여기저기 다 이름 석자 박아달라는 게 아니라 적어도 내 기력과 감정과 인맥을 갈아넣을 가치가 있는 일이냐는 거다. 사실 업계 공고는 보기만 해도 감이 온다. 실컷 해놓고 도와주신 분 1인, 외 1인...으로 건너가는 그런 일들. 내가 아니라 당장 내일 다른 사람이 와도 할 수 있는 일들. 물론 네가 아니면 안 돼,라고 말해주긴 하지만 내가 없어도 잠시 삐걱거리거나 아예 없어져도 괜찮은 일들.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차이 없는, 그래서 기를 쓰고 해냈던 사람만 물색없이 순진하게만 되어 버리는 상황들.(죄송해요. 제가 너무 진지했네요.) 다시 들어가 봤자 이제는 더 쳐주지도 않는 경력이 몇 개월 더 덧붙여질 뿐인데. 그냥 돈과 소속감 때문에 또 가야 하나 싶은 마음.
회의와 의문을 일찌감치 가졌던 누군가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힘든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지친 모습으로 찾아와 '회사가 전쟁터면 바깥은 지옥이다'라는 말로 월급쟁이들을 안심시켜 주었을 테고. 그러나 또 몇몇 사람들은 일찌감치 사장이 되고, 빌딩을 올려 전 국민이 크리에이터가 되어 창업하는 꿈을 꾸게 만들었다. 난 그냥 천성이 게으르고 안일하여 남의 돈 받고 여하튼 30여 년을 그것도 대부분 정규직으로 살아왔으니 지금 청년들보다야 백번 낫지 감사하며 조금만 더 서 있다가 출발할 예정이다. 어차피 취직도 어려우니 지금이 적기다 생각하며 돈은 안 벌리지만 나를 위한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가고 있다. 언젠가는 또 작은 결판이 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