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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uze Jul 01. 2019

<쾌락독서>

시니컬하면서 따뜻하면 어쩌자는? 

무려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님의 에세이집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책을 읽어라' 리스트를 제시해 주는 책은 왜 필요한지 늘 의문이었다. 영화나 그림, 미식 관련 책은 그렇다 치고 독서를 잘 하기 위해 별도의 책을 따로 읽어야 하나? 그 시간에 걍 보고 싶은 책을 읽음 될 일이지. ^^;;

여튼 이 판사님의 경우 공무 수행 틈틈이 소설에 드라마 심지어 에세이까지 내시는 지라 반쯤은 존경심에 펼쳐 보았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생각하면서.

전반적으로 흥미로운데 그건 이 분이 거의 나와 동시대여서 독서를 비롯한 전반적인 문화 향유 여정이 많은 부분 일치하기 때문인 것 같다. 특히 미국 드라마 <데이지공주>를 언급한 부분에서는 까무라칠 뻔 했다. 심지어 시드니 셸던의 <깊은밤 깊은 곳에>라니!

제목 #쾌락독서 에서도 느껴지듯 프롤로그부터 책은 원래 즐거운 놀이라며 가볍게 출발해 유년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책과 자신과의 관계를 풀어보이는 그의 자세는 짐짓 시니컬하다. 시종일관 관찰자적 시점, 때로는 방관자로서 뒤로 물러나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세상의 부조리함을 수없이 보고, 듣고, 또 조정해가며 쌓인 경험은 어디 가지 않는 법. 소년기부터의 다채로운 독서 여정을 묘사한 초중반부보다 법을 다루는 이의 자세가 배어나오는 후반부가 더 잘 읽히고 공감이 간다.  

'내 취향이 아닌 글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적나라하게 묘사한 '죽은 글쓰기'의 예를 들어놔서 빵 터졌다. "충동의 층위에서 욕망의 층위로 이동하는 지점에서 서사는 붕괴되고 주체의 환상이 타자의 향유에 대한 방어로 착종되는 생의 본원적 비극성에 도달하여 우리는 비로소 자아의 인지부조화에 각성하고 마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쓰는 사람들을 좀 알고 있다.  ^^

시종일관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알고 보면 조금만 공부해도 1등하는 천재 타입인지 고 3때 잠깐 숨돌리려고 소설책 보다가 재수하는 선배한테 불려나가 '너 보면 스트레스 받으니까 다른 데서 공부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책 읽는 것조차 폐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정독도서관' 에피소드도 실려 있다.

좋아하는 책을 다 살 수 없어서 친구네 집을 들락날락했고, 비틀즈의 음반이 듣고 싶어 긴 시간 버스를 타고 한 회사원의 집에 찾아가 테이프 녹음을 해오는 등 가정 형편이 그닥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간접경험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말한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중립적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면, 그건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안온한 기득권 때문이다."

'법조인에게 가장 필요한 책' 챕터에서는 앨런 M.더쇼비츠의 책 <최고의 변론>을 권한다. 미국의 형사법 변호사인 더쇼비츠는 미국 형사재판을 지배하는 13개의 법칙을 소개했다 . 이 법칙은 제 1조 '대부분의 형사 피고인은 사실상 유죄다'로 시작해서 제13조 '정의 실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로 끝난다. 씁쓸한 말이지만 그나마 세상에 진실이 있다면 바로 이게 아닐까.

번지르르한 미사어구와 그럴듯한 변명, 대담한 자기 어필로 무장한 사람들 뒷편에서 무관심한 듯 어른거리고 있지만 사실은 주의깊게 주변을 살피고 있는 그의 예민함은 '여행과 책, 그리고 인생 2'에서 느껴진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여행 갔을 때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고래를 관찰하기 위해 올라탄 배 안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묘사한 대목이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 고래를 보러온 핀란드 노부부가 중년의 발달장애인 딸을 보살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녀가 계속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른다. 노부부는 당황하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쓰고, 배 안의 모든 이들은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불편한 침묵을 견딘다. 


"난 마치 인생에 대한 은유 같다고 생각했다. 대자연은 무심하게 아름다웠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쉬운 위안은 없었으며 타인들의 최선은 예의바른 방관 정도였다."

때마침 고래가 떠오르고 사람들은 구원받는다. 


"새끼를 위해 지구 반바퀴를 헤엄쳐온 포유류의 눈은 따뜻했다. 물론 이 시선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위로받고자 하는 것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그런 어리석음이라도 있기에 견뎌낼 수 있는지 모른다. 쉽게 보답이 주어지지 않는 삶을."

실제 그 일은 짧은 순간 일어났고, 아마도 현장에 있었던 대부분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찰라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언어로 되살려 내는 것, 그래서 후에 읽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이미지로 떠올리게 하는 것이 작가다. 난 왠지 DSLR와 캠코더와 휴대폰을 주렁주렁 든 다국적 관광객들이 깊은 눈빛의 고래와 마주보며 어리둥절해하는 장면을 떠올렸고, 그 순간 이 책을 읽은 것에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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