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만 아플 때와는 조금은 다른 느낌의 '마음의 병' 입문 두번째 이야기
몸만 아플 때와는 조금은 다른 느낌의 '마음의 병' 입문 첫번째 이야기
영수증 리뷰만 인정된다는 한 병의원 리뷰 플랫폼에서 집에서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 클리닉들을 몇몇 리스트업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괜찮아 보이는 한 곳에 전화를 해 진료예약을 했다. 짐작대로 초진의 경우 금방 갈 수는 없었고 사흘 후에 가기로 했다. 그 곳을 선택한 이유는 다섯 개에 달하는 리뷰 모두 선생님이 친절하시다, 이야기 잘 들어주신다, 심지어 구해주셔서 감사하다까지 긍정적인 내용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뭐 진찰실 들어가자마자 내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주는 선생님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며 내일을 향한 희망에 차는, 그런 드라마틱한 상황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난 이미 지인들의 경험담이나 관련 카페 게시글 등을 통해 동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받을 수 있는 케어는 내과, 안과 등 다른 과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길어야 5~10분 정도의 진찰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처방, 약 타고 결제하기. 이걸 모르고 가면 크게 실망할 수 있다.
남의 절절한 고통보다는 내 손톱 밑에 자라나는 거스러미가 더 절실한 법이다. 심지어 드러내 잘 말할 수 없는 마음의 병을 가졌다면 이러다 큰 일 나는 거 아닌가 싶어 걱정이 태산일 것. 그래서 큰 결심 하고 병원 문턱을 넘어봐도 특별한 것은 없다. 그냥 다른 과나 다름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로비에는 나 같은 환자들이 가득 앉아 기다리고, 호명 순서에 따라 들어갔다 나왔다, 오고 간다.
어찌어찌 고통을 호소하고 심리검사도 받아서 진단을 받긴 했지만 뭔가 아쉽다, 영화에 보면 그 뭐냐 긴 의자에 누워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던데...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이라면 10회 내외의 세션으로 구성된 전문 심리 상담을 병행하는 것도 대안이다. 단, 돈이 좀 든다. 내 경우는 의사와의 면담만큼이나 다른 목적이 중요했기 때문에 짧은 진찰시간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른 목적은 바로 약.
신경정신과 질환이 F코드로 분류되는 것 역시 이 약 때문이다. 중추신경계에 직접 작용하는 향정신성 의약품은 의사의 처방 없이는 손에 넣을 수 없다. 가정의학과, 내과 등에서도 처방되긴 하지만 관련 증상이 있다면 전문 과를 찾아야 할 터. 정신건강의학과에서도 대면 진찰 후 처방이 원칙이고 2주 이상은 잘 주지 않는다. 난 그 약이 가장 필요했다. 이미 다른 병은 없나, 의심가는 소소한 증상들에 대한 다른 과 진찰을 거쳤고, 이제 남은 건 정신과 약 뿐이었다. 딴 것보다 계속 '정신일도 하사불성'을 되뇌면서 쌩으로 견디는게 지겨워졌다.
돌고 돌아 온 정신과지만 별로 인상적인 것은 없었다. 선생님은 적당히 친절하셨고, 내가 '다리 위, 버스, 극장, 가슴 뛰고 긴장, 겁이 덜컥, 울렁' 등 전형적인 몇몇 단어를 내뱉자 지체없이 매일 아침 식후에 먹을 한 알의 항우울제와 곁들여 먹을 한 알의 소화제를 처방하셨고, 위기가 닥칠 때 먹으라는 '비상약' 한 알도 쥐어주셨다. 불안을 단기에 완화시킨다는 그 약이 7알이나 담긴 플라스틱 약병을 건네 받았을 땐 어찌나 안심이 되는지. 플라시보 효과를 극적으로 체험한 기분이었다.
아침약 두 알에 비상약 한 알. 이 정도면 사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아주 경미한 편이다. 내 증세는 그 정도로 얕은 편이었던 데다 무엇보다 스스로 '제가 좀 이상한데요'라고 말하는 이른바 병식(病識)이 있는 환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공황 증세를 겪는 분들 중에서는 거의 종합검진 수준으로 온갖 검사를 다 거치고서야 정신과에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내가 이런 약해빠진 병에 걸렸을 리가 없어, 격분하기도 한다. 하긴 그 마음 이해는 간다. 첫 방문 때 선생님이 공황에 대해 설명한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인도를 따라 걷고 있는데 옆 차도에서 마주오는 트럭이 차선을 넘어 나한테 달려드는 것만 같아 공포에 질리는 상태라고 하셨다. 있지도 않는 위험을 만들어내며 남들은 다 멀쩡히 넘기는 상황에서 혼이 나가니 얼마나 민망하고 겸연쩍은가.
건강보험 전산망에 F코드를 등재한 댓가로 난 마법의 알약을 얻어왔지만 첫 만남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자기에게 맞는 약을 찾기 전까지 좀 겪어야 한다는 적응기가 나에게도 온 것. 처음 처방된 아침 약을 먹고 하루 정도 지나자 입이 마르고 혀가 쩍쩍 붙는 느낌이 들어 숨이 막혔다. 게다가 시도때도 없이 잠이 쏟아져 아무리 자도 피곤했고 몸 전체의 열감도 심했다. 클라이맥스는 엄청난 근육 떨림. 밤에 눈을 떴는데 몸 전체가 경련을 일으켜 마치 거센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영화 <엑소시스트>의 빙의 장면이 이럴까 싶었다.
결국 복용 4일만에 다시 전화를 걸어 예약을 앞당겼다. 병원가기 전 날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몇 번이나 양해를 구하고 바람을 쐬러 나오면서 가까스로 일을 마쳤다. 이후에는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9정거장 전철을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아예 비상약을 꺼내 손에 들고 겨우 버텼다. 극도로 예민해진 신경 전체로 전철의 파열음과 진동이 느껴졌다. 중간쯤 갔을까. '앞 차와의 간격 조정을 위해 잠시 정차한다'는 안내 멘트와 함께 몇 분쯤 멈춰섰을 때는 그대로 뛰어나갈 뻔 했다. 중간에 낄까봐 또 무서워서 내리지도 못했지만.
다행히 다시 처방받은 약은 나에게 맞았다. 졸립지도 않고 입이 마르지도 않았다. 몸이 까부라질듯 노곤한 상태에서 벗어나자 좀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이 되어준 건 '비상약'의 존재였다. 매일약은 그렇다쳐도 비상약에는 의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몇 번을 참다가 1주일이 지난 어느날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그 약을 털어넣었다. 좀 오래 걸었더니 갑자기 불안해져서 먹었는데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약을 먹고 조금 더 걷고 있는데 문득 발걸음에 좀 힘이 실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버스를 타고 뒷자리에 앉았다가 비로소 깨달았다. 버스 안을 제대로 바라보는 게 몇 달 만에 처음이라는 것을. 다리 위에서의 그 날 이후 난 빨리 내리기만 바라면서 고개를 떨궈 내 다리나 발 밑만 보곤 했다. 눈을 들어 다른 사람들이나 창 밖을 보면 가슴이 뛰곤 했다. 특히 버스가 사거리 같은 데서 신호를 놓쳐 멈춰설 때마다 속이 답답해지면서 겁이 났다. 상대적으로 비좁고 정류장이 많으며 천천히 달리는 마을 버스를 한동안 못 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달랐다. 앞을 보고 운전하는 기사분의 뒷모습, 차에 타는 사람들, 벨을 누르고 내리는 사람들, 창 밖의 풍경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냥 늘 그랬던 것처럼 평범하게. 버스가 무서워지기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일상이 내게 돌아왔다. 단 한 알의 약으로.
뭔가 기적처럼 느껴져서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다음 한참을 더 걸었다.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고, 길가의 가로수는 생생한 녹색으로 빛났다.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우선은 안도감이 들었다. 약 한 알 삼켰다고 이렇게 나아지다니 마음의 병도 결국 병일 뿐이구나. 이제 약을 먹으면 되겠네. 그러면서도 또 억울하고 아쉬웠다. 이 약이 가지고 온 평안을 놓치고 싶지 않은데, 찾아보니 약효는 5~6시간 간다고 했다. 특히 처음 쓸 때 효과가 드라마틱하다고. 또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마약을 하는구나 싶었다. 전두엽 등 뇌에 바로 작용하는 향정신성 의약품들. 지금은 내 증세를 가라앉혀 주는 역할을 하지만 언젠가는 멀리해야 하는 불편한 한 때의 파트너가 되겠지. 그래서인지 관련 카페에는 '단약'이라는 말이 많이 보였다.
어쨌거나 난 나의 불안과 공황이 '공식적인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했고, 그것만으로도 F코드 입문은 괜찮았다. 여전히 심약함, 의지박약, 신경과민의 결과라는 꼬리표가 달려있지만 어쨌거나 적어도 정기적으로 들르는 병원에서는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그러면 언젠가 어떻게 될 건지 예상하고 계획을 세워볼 수 있다. 물론 예상하고, 계획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첫 관문을 넘으면서 다음 단계로 진입했는데, 이때 마음의 병은 몸의 병과는 좀 달랐다.(3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