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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zinchai May 27. 2022

살아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


희원은 마지막으로 찻집에 가보고 싶다 했다. 희원과 차라니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군말 없이 그러겠노라 했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은 차>는 중앙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사람들도 오지만, 근처 길고양이들도 와서 밥을 먹고, 목을 축이기도 하는 곳. 겉으로는 인자하고 마음씨 좋은 찻집 주인으로 보이는 사장님이 실은 로컬 밴드계의 유명인사라고도 했다. 한 때 로컬 씬에 몸 담았던 희원은 언젠가 사장님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기타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고 했던가. 그 후로 가끔 혼자 여기 와 차를 마셨다고 한다. 그러면 소란스런 마음이 이내 고요해진다고.


자리에 앉으면 별다른 메뉴를 주문하지 않아도 사장님이 알아서 차를 내어주신다. 1인당 5천 원만 내면 마치 오마카세 스시야처럼 사장님이 엄선한 차들이 나름의 순서를 지켜 나오는 멋진 곳이다. 본래의 룰대로라면 사장님께 맡기는 게 가장 현명하겠으나 샘플로 나열된 차들 중 철관음이 눈에 띄어 특별히 부탁드렸다. 희원은 날이 덥다며 유일한 아이스 메뉴인 말차라떼를 시켰다.


<좋은 차>를 오기 전에도 가고 싶은 곳을 정해 며칠은 돌아다녔다. 경양식 돈가스를 팔고 있지만 1세대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드립 커피 맛이 더 좋은 <가미>, 사람만큼이나 길고양이 집도 많이 찾아준 박 소장님이 계신 <태평양 부동산>, 난생처음으로 북 토크를 가 본 <책방 한탸>, 뚝배기에 잠봉뵈르를 담아주는 업사이클 카페 <한국 에너지> 등 우리의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곳들은 대체로 다 돌아다녔다. 누가 보면 아예 한국을 뜨나 싶을 정도의 요란한 세레머니지만, 오래도록 부산에서 살던 이들이 늘그막에 서울에 가 살기로 결정한 건 그만큼 큰일이었다. 특히 내게는 천재지변과도 같은 일이었는데 처음엔 완강히 거절하는 나를 설득하느라 희원은 몇 달 애를 먹기도 했다.


서울대입구역이 실은 서울 입구더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근처에 집을 구했다. 지금 집을 구하기 전에는 부동산 사기로 계약금 2백만 원을 날려먹기도 했다. 서울에서 두 발 뻗고 누울 자리 하나 구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우리는 돈이 별로 없는데 신축은 너무 비싸고, 구옥은 낡은 데다 비쌌다. 부산에서 같은 값이면 방 서넛 딸린 집을 구할 수도 있는데. 서울은 적당히를 모르는 곳 같았다. 적당히 구는 인간들은 발도 붙일 수 없는 곳 같았다. 며칠을 부리나케 움직여 대출을 알아보고 겨우겨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찍고도 한동안은 이게 제대로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어 마음을 졸였다.


“잘 살 수 있을까?”

“그럼.”


이렇다 할 구체적인 계획도 없으면서 희원은 잘만 대답했다. 서울로 가는 게 마치 모든 문제의 해답인 것처럼.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우리가 응당 가야 할 곳인 것처럼. 보통 서울에서 실패를 하고 지방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인생은 우롱차 다음에 오는 보이차처럼 정해진 수순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이고, 이런. 우유가 다 떨어졌네.”


근처에서 사 올게. 잠깐 앉아 있어요. 카운터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사장님은 그렇게 말하며 황급히 문 밖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주인도 없는 가게에 덩그러니 둘만 남았다. 아니, 정확히는 찻집에 밥을 먹으러 오는 고양이 뚱이까지 셋이지만 뚱이는 저녁을 배부르게 먹었는지 일찍 잠에 들었다.


“진짜 잘 살 수 있을까?”


나는 계속해서 묻고, 희원은 “살아보고 정 안 될 것 같으면 다시 내려오지, 뭐.” 같은 속 편한 소리만 했다. 잠시 후, 사장님이 돌아와 아이스 말차 라테와 철관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차들을 내어주셨다. 우리는 뜨겁고 시원한 차를 번갈아 홀짝이며 <좋은 차> 벽면에 붙은 여러 장의 포스트잇을 들여다봤다. 각자의 사연으로 여길 오간 사람들이 남긴 메시지를 읽다가 희원이 새 포스트잇을 뜯었다. 연필을 쥐고 뭐라고 써 내려가는데 잘 보이지는 않았다. 거기에 써 내려간 것은 희망일까, 후회일까, 그것도 아니면 전혀 새로운 무엇일까.


역시 살아보지 않고서는 모르겠지.


희원이 메시지를 남기는 동안 나도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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