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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Sep 12. 2020

오늘도 내 일을 합니다.

  오늘도 내 일을 한다. 이것은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바뀌고 내 나이와 주변 환경이 달라져도 달라지지 않는 하루의 공식이다.


  신입 사원 시절, 내 하루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 비교적 기상시간이 자유로원던 대학생 때와는 달리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났다. 꼬박꼬박 아침 8시에 출근을 하자니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기도 했다. 못할 것 같은 새벽 기상이 익숙해질 무렵에는 지각인 줄 알고 새벽에 깜짝 놀라 기상했다가 주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잠드는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책상에 가만히 앉아 강단에 서있는 사람의 말만 열심히 받아들이던 눈과 귀는 갈 곳을 잃었다. 바짝 긴장한 몸으로 눈알을 굴려 눈치를 보고 귀를 쫑긋 세웠다. 내가 할 일을 찾아서 해야 하는 것이 영 어색했던 것 같다. 그래도 한 사람의 몫을 해내겠다며 선배 연구원들이 하는 일을 관찰하고 있으면, 작은 미션이 주어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작은 미션이었는데, 그땐 회사생활도 프로젝트도 모르다 보니 쉽지 않게 느껴졌다.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니 프로젝트 처음부터 끝까지 뒤적이고, 혹시 여기가 아니면 어쩌나 해서 다시 뒤적이고, 이렇게 해결해야지 했다가도 이게 최적의 해결책일까 싶어 다시 생각하고, 비슷한 문제를 다른 선배 연구원은 어떻게 해결했는지 봐야겠다며 다시 프로젝트를 뒤적이면서 그 작은 미션을 수행했다. 그러고 나면 뭐 한 것도 없는데 어깨 위에 곰 두 마리를 얹은 것 같은 피로감을 안고 하루를 마감했다.

  첫 직장에 출근했던 2011년 봄날, 25살의 나는 그날도 바뀐 내 상황에 적응하며 하루하루 내가 할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의 어색함과 어려움 대신 업무 센스와 익숙함으로 일을 대하게 되었다.


  2년 7개월이 지난날이었다. 마음의 변화가 생겨 이직을 하기로 했다. 매일 5시에 일어나던 습관 덕분에 새직장의 10시 출근이 힘겹진 않았다. 그런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언제부턴가 10시에 간당간당하게 맞춰서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뀌기 않을 것 같던 기상 습관이 또 바뀌었다.

  경력직인데 다시 신입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전 회사에서 몸에 익혔던 업무 프로세스는 이곳에서 통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들여다보던 코드가 아닌 새로운 코드를 읽어야 했다. 간단한 기능을 하나 바꾸려고 작업을 해도 왠지 자신이 없었다. 어딘가 빠트린 구석은 없는지, 코드 스타일은 이곳의 스타일과 맞는지, 이 방안보다 다른 방안을 더 선호하는 건 아닐지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또 작은 수정 하나에도 프로젝트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보고 그럼에도 빠트리고, 다른 사람은 비슷한 기능을 어떻게 구현했나 찾아보고 그럼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날들을 보냈다.

  그렇게 27살 가을날에 다시 몸에 군기를 바짝 넣고 이전과 달라진 내 하루 일을 했다. 그렇게 또 경력을 쌓다 보니, 어느덧 나는 9년 차 개발자였다. 회사 일과 회사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나에게 당연한 일상이 되었고, 나름의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10년 차를 코앞에 둔 2019년 4분기에 책상을 정리하고 자산을 반납했다. 이제 더 이상 회사는 내 일터가 아니었다. 4시, 6시, 7시, 어떤 날은 8시에 일어나기도 했다. 일관성 없는 기상시간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기가 우는 시간이 내 기상 시간이었다. 불규칙하고 어떤 날은 새벽보다 더 새벽 같은 시간이기도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벌떡벌떡 일어나 졌다. 그렇게 내 기상시간은 아기 리듬에 맞춰졌다.

  엄마라는 건 공부해본 적도 없는 분야라 신입 사원 시절이나 경력 입사자 시절과는 다른 두려움이 들기도 했다. 9년간 쌓은 업무 경험은 엄마라는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매일 보던 컴퓨터 대신 매일 아기를 안았다. 아기를 안아본 적도 없어서 안는 것조차 영 어색했다. 그래도 엄마 역할을 해내겠다고 기합을 넣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야 했다. 아기가 우는 이유를 모르니 찾아서 공부하고, 그러다가도 혹시 빠트린 게 있을까 싶어 다시 찾아보고, 실전에 적용하자니 확신이 안 서서 다른 엄마들은 어떻게 하는지 뒤져보고, 내가 선택한 방법이 아기에게 맞는지 아기를 관찰하는 나날들을 보냈다.

  33살 겨울, 내 업무는 더 이상 책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 업무 공간은 안방과 거실을 오갔다. 다시 한번 달라진 상황에 적응하며 하루하루를 내 일을 했다. 그렇게 달라진 내 업무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아기를 대하는 어색함과 불안함은 엄마의 센스와 능숙함으로 변했다. 점점 더 날이 지나면서 나름의 육아 가치관 또한 세우게 되었다.


  34살 봄날이다. 요즘 아기의 기상시간은 8시다. 나도 8시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렇게 평소처럼 오늘도 하루의 내 일을 시작한다. 그렇게 다른 날들처럼 오늘도 내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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