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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Sep 27. 2020

그 많던 조각은 어디로 갔을까

  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름 하나 없는 얇은 회색 재킷을 입고 퇴근했다. 쌍꺼풀 없는 그의 눈에 현관 조명이 반짝였다. 나는 그에게 그의 엄마가 20분 전에 집에서 떠났다고 했다. 그의 집에 사는 작은 사람이 잠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눈에서 사라진 현관 조명이 안경렌즈에서 반짝이다가 그가 고개를 숙이자 안경테 위에서 반짝였다.


  “우리 엄마는 나보다 쟤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아!”


그는 하얀 중문을 지나서 까만 백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퉁명한 그의 목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내가 그의 행동을 눈여겨본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는 종종 작은 사람의 간식을 몰래 먹었다. 작은 사람의 간식인 동결건조 사과가 야금야금 사라졌다. 그는 작은 사람의 식사를 질투했다. 작은 사람의 식사 재료로 한우를 사 오는 날이면 자신은 왜 캐나다산 돼지고기를 먹어야 하냐고 투털 댔다. 그는 작은 사람의 공간을 부러워했다. 작은 사람의 방 가구 배치를 바꾸다가 돌연 이 큰 방을 조그마한 녀석이 혼자 쓴다고 씩씩대기도 했다. 장난인 듯 웃는 얼굴과 가벼운 말투 뒤로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아랫입술이 뾰족하게 밀고 나와 윗입술보다 더 길어질 때, 나는 그의 표정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떠올렸다.


  아마 올해 봄이 시작될 때였다. 그가 진갈색 거실장 앞에서 하얀 셔츠와 양복바지를 입고 앉아 있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목을 숙여서 작은 사람에게 얼굴을 가까이 두고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의 가는 입술은 삐죽거렸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대답했다.


  “아니, 얘가 없을 때는 우리 집에 한 번도 안 오셨는데!”


그는 아랫입술을 더욱 삐쭉 내밀어서 윗입술을 덮었다가 내렸다. 그날은 90세가 다 된 그의 외할머니가 불편한 거동을 이끌고 집에 왔다가신 날이었다. 이날부터 종종 그는 입술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의 외할머니가 왔다 가고, 어머니가 왔다간 날을 지나 산책하기 좋은 날이 되었다. 나는 작은 사람과 오후 산책을 마치고, 아파트 앞 놀이터에 앉아 있었다. 5미터 앞에서 남색 셔츠를 입은 그가 걸어왔다. 언제나처럼 그는 단정하게 셔츠 단추를 목까지 채워 입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던 그는 나를 보고 입꼬리로 팔자주름을 깊게 만들며 웃었다. 웃을 때 생기는 그의 얼굴 주름은 그의 마른 얼굴을 더 말라 보이게 했다. 그가 작은 사람 전용차 가까이에 다다르자 발소리를 낮춰서 작은 사람 뒤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작은 사람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홱하고 내밀었다. 작은 사람이 웃자 그가 웃고, 그가 웃자 작은 사람이 웃었다. 웃음소리 속에서 나는 그에게 그의 아버지가 다녀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작은 사람과 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갔다고 했다. 그의 입꼬리가 내려가면서 팔자주름의 깊이가 옅어졌다. 이어서 그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했다.


  “다들 얘가 중요하구나.”


그의 눈은 웃음이 사라져 주름 자국만 남고, 옅어진 팔자주름에는 그림자가 채워졌다. 더 이상 입술도 뾰족하게 만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윗입술 끝자락으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를 뿐이었다. 그의 씁쓸한 표정은 또 다른 날의 그의 표정과 겹쳤다.


  초여름 주말이었다. 그는 하얀 폴로셔츠에 하늘색 반바지를 입고 내 뒤를 쫓았다. 나는 작은 사람은 안고 서서 토닥이고 있었다. 그와 같이 있던 작은 사람이 울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내 시선을 받은 그는 움찔하더니 자신이 울린 게 아니라고 말했다. 작은 사람에게 ‘너 때문에 내가 혼나잖아’라며 틱틱거리는 말을 했다. 조금 지나자 내 가슴에 볼을 대고 안겨있던 작은 사람이 울음을 그치고 방실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자신도 안아달라고 말했다. 아기를 달래느라 그럴 수 없다는 내 대답에 그의 입술은 샐쭉해지고 눈은 가늘어졌다.


  “맨날 얘만 안아주고.”


그의 얼굴에 분노가 스며들었다가 빠졌다. 네모난 안경 속 힘 빠진 얇은 눈꺼풀이 그의 눈동자 위를 덮고, 가늘게 다문 입술은 힘없이 쳐졌다. 원래 뽀얀 그의 얼굴이 유독 어두워 보였다.


  신랑은 엄마와 사이가 좋은 아들이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와 수다 떠느라 늦게 잤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다. 결혼해서도 엄마와 만나면 한두 시간 넘게 이야기 나누었다. 또 외할머니에게 신랑은 첫 손주였다.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낮에는 외할머니가 신랑을 보살폈다. 신랑은 성인이 돼서도 외할머니의 생신 모임과 어버이날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신랑에게 아버지는 조용히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를 언제나 안아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아빠가 된 그에겐 많은 것이 달라져있었다.



   36년간 그의 것이던 애정 조각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동안 받아오던 애정 조각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는 엄마와 아버지의 애정 조각 일부를 떼서 아기에게 주고, 할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받던 애정 조각도 떼서 아기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꽉 쥐고 있던 아내의 애정 조각도 떼서 아기에게 쥐어줬다. 그에게서 떨어진 애정 조각은 아기에게 향했다.


  7월 주말에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하얀 바디슈트를 입은 작은 사람은 통창 넘어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고, 하얀 셔츠를 입은 큰 사람은 종이로 작은 사람의 세상을 꾸며주고 있다. 그는 빨간 종이로 된 지붕을 집 모양 종이 위로 얹어서 작은 사람을 위한 집을 완성했다. 신난 목소리로 다 됐다고 외친 후, 종이집 안으로 아기가 들어가도록 놓아줬다. 그가 만들어 준 종이 집 안에서 정신없이 노는 아기 모습을 그도 정신없이 바라봤다. 그의 아기가 고개를 돌려 방긋 웃어주면 그도 좋아서 방긋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이 예뻐서 두 사람과 거리를 두고 앉아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화면 속 아기의 세상은 전보다 커졌고, 그의 웃음도 커졌다. 안경 렌즈 속 그의 눈에 햇빛이 반짝였고, 가는 입술은 양옆으로 펼쳐지며 더 가늘어졌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와 함께 팔자주름은 깊어졌지만, 뽀얀 얼굴을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알까. 그가 떼어준 애정 조각만큼 아기의 세상이 넓어지고 있다는 걸. 그의 아기가 그에게도 자신의 애정 조각을 주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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