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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Sep 27. 2020

모닝커피

  또각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메리 제인 스타일의 까만 구두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H 라인 롱 스커트가 하늘거렸다. 굵은 스트라이프 무늬가 박힌 블라우스의 넓은 소매가 사무실 책상에 닿을 때 나는 머그잔을 잡았다. 그리고 나면 지체 없이 커피머신으로 향했다. 업무 시작 전 카페인으로 정신도 깨우고, 커피 마시는 여유도 챙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커피와 함께 자리에 돌아오면 모니터를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이곤 했다. 화면 속 글자들은 만약의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어떻게 행동할지 말하고 있었다. 모든 언어는 만약-그렇지 않으면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언어는 모두 if-else(만약-그렇지 않으면)로 풀어서 작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그래머란 만약의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겠지. 모닝커피로 가져보려던 여유는 언제나처럼 화면 속 만약-그렇지 않은 문장들로 인해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어떤 날은 카페에서 커피를 사 먹기도 했다. 주로 당이 필요한 날이었다. 달달한 당은 몸이 움직일 에너지를 주고, 카페인은 정신이 움직일 자극을 준다. 당과 카페인의 조합은 전날 야근으로 지친 몸과 정신을 쌩쌩하게 돌려놓는다. 아침이 유독 힘겨운 날이면 바닐라라테 한 모금을 마시고 반쯤 감겨있던 눈을 번쩍 떠서 사무실로 향했다.


  모닝커피는 업무 시작 전 중요한 일과였다. 먼저 향으로 한 번, 카페인으로 두 번 아침에 나를 깨웠고, 업무 전에 커피를 가지러 가는 시간과 마시는 시간은 마음에 여유를 챙기도록 도왔다. 모닝커피는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고 알리는 신호였다. 9년 간 회사가 바뀌고, 팀이 바뀌고, 사무실이 바뀌어도 모닝커피는 언제나 내 출근길을 함께했다.


  출산 후 한동안 모닝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또각하던 발걸음은 힘이 빠져서 땅을 쓸고 다녔고, 더 이상 ‘만약-그렇지 않으면’을 고민하지도 야근을 하지도 않았다. 산후조리원 침대에 앉아 눈썹도 그리지 않은 채 부은 다리와 젖몸살에 좋다는 락타티를 마셨다. 부드럽고 따뜻한 락타티도 맛있었지만, 입안 가득 퍼지던 쌉싸름함과 코끝에 느껴지는 강렬한 향이 그리웠다.


  그러다 2개월 후, 다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모유수유가 끝나서 커피를 마셔도 되니 모닝커피로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집에 있는 캡슐 커피 머신에 커피 캡슐을 넣자 ‘우웅’하고 웅장한 소리가 났다. 이어서  커피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쌉싸름하고 고소한 향에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커피머신 추출부에서 머그잔으로 떨어지는 커피를 보고 있자니 반가운 기분 뒤로 다른 감정이 뒤따랐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내 머리는 항상 깨어있었던 것 같다. 회사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내리는 순간에도, 사무실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는 순간에도,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순간에도 사실 나는 항상 ‘만약-그렇지 않으면’을 고민했다. 이미 깨어있는 뇌에게 커피로 채찍질을 해왔던 건 아닐까.


 머그잔에 모인 커피의 온기로 손을 데우며 한 숨을 쉬었다. 머그잔을 든 채 거실 소파를 향해 맨발을 내딛을 때마다 폭넓은 검은색 치마 끝에 실밥이 흔들렸다. 원래는 신랑 것이던 무채색 셔츠를 입고 셔츠 소매는 규칙 없이 접어 올렸다. 소파에 등을 대고 앉아서 커피를 홀짝였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에 모닝커피로 나를 깨우며 하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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