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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Oct 18. 2020

일주일하고 하루 빨랐던 첫째 날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날이었다. 아침 10시가 다 된 시간에 나는 기모 소재로 된 형광색 맨투맨 티를 입고 까만 코드로 몸을 감싸서 현관문을 나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샤워를 하고 화장은 하지 않은 채 설마 하는 마음에 짐을 싸 둔 캐리어는 작은 방에 그대로 두고 나왔다. 혹시와 설마를 오가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초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스치듯 걸어서 병원에 도착해 대기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대기자를 표기하는 대기실 화면에 내 이름이 7번째로 올라갔다. 3분쯤 지나자 진료실에서는 앞의 대기자들을 모두 건너뛰고 내 이름을 불렀다. 빨라진 심장박동 소리가 내 귀에서 울리는 듯했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날도 한결 같이 속전속결로 진료를 보시던 담당 의사는 내 상태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오후에 출산하시겠네. 바로 입원하세요.”


  입원실은 2층이었다. 6명이 함께 쓰는 입원실에서 한 침대만 커튼이 열려있었고, 그 침대에는 입원복이 놓여있었다. 입원복으로 갈아입고, 관장을 하고, 무통주사를 맞으러 왔다 갔다 하면서도 내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았다. 하얀 커튼 안에 놓인 침대에 누워 메모 앱을 켜서 새벽에 기록해둔 진통 주기를 확인했다. 새벽 3시부터 7-10분 간격으로 시간이 기록되어있었다. 출산예정일이 아직 남기도 했고 주변에서 첫째 아이는 예정일보다 늦게 태어난다고 이야기하곤 했기 때문에 출산이 오늘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일주일하고 하루. 딱 그만큼 엄마가 될 준비가 덜 된 것 같았다.

  입원실에 누워서 출산의 순간을 기다리는 일은 두려웠다. 신랑이 오기 전까지 침대에 누워 태동 측정기를 보면서 그래프를 따라 내 심장도 같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출산 2-3주 전쯤 출산 교실을 방문했을 때, 강의하던 조산사는 이런 말을 했다. 아기는 자궁에서 안전하고 따뜻하게 지내고 있는데, 갑자기 외부 압력이 가해지면 얼마나 무섭겠냐고. 엄마의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아기에게 셀렘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라고. 조산사 말처럼 나는 아기에게 두려움이 아닌 설렘을 주고 싶었다. 아직 실감 나진 않지만, 나는 너를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어. 아직 경험하지 않은 일은 설레는 일이야. 내가 너를 만나는 일. 네가 세상을 만나는 일.

  하얀 커튼이 열리고, 모직코트를 입은 신랑이 누워있는 나를 보고 웃었다. 신랑은 내 옆에 앉아 손을 잡아주었는데, 그때 그게 얼마나 큰 안심을 안겨주었는지. 신랑과 나는 서로 얼굴을 보며 진짜 오늘이냐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신랑은 출근 전 내가 병원에 갈 걸 알고 있었다. 신랑은 출근하면서도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연락했다. 걸어서 10-15분 거리인 병원을 꼭 택시를 타고 가라며 걱정 섞인 당부도 했다. 결국 난 걸어서 병원에 갔지만, 신랑의 그 마음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훈훈하다. 입원하면서 신랑에게 연락했을 때, 신랑은 얼마나 서둘렀는지 송도에서 서울대입구까지 그 먼 거리를 1시간 30분 만에 도착했다. 신랑은 입원실 커튼 안 공간에서 내게 고맙고 미안하다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또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신랑은 나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있었다. 내 손을 잡고 내 눈을 봐주고, 내 옆에 앉아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누워있는 나와는 달리 불편한 간이 의자에 앉아서 4-5시간 동안 내 옆을 지켰다. 그날, 내가 우리 아기를 기다리는 시간에 두려움보다 설렘을 담을 수 있었던 건 신랑 덕분이었다.


  오후 4시가 넘어 분만실로 이동했다. 가족분만실에는 침대와 소파가 놓여있었다. 신랑은 소파에 편하게 앉을 수도 있었지만, 여전히 간이 의자를 펴고 내 옆에 앉아서 내 손을 잡아주었다. 태동 측정기를 달고 아기의 활동을 모니터링하면서 곧 다가올 출산의 순간에 다시 무섭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아마 내 손을 잡고 있는 신랑도 그랬을 테지. 

  “오빠랑 가족이 돼줘서 고마워.”

신랑은 안경 속 눈에 눈물을 그렁이고, 입술은 또박또박 움직이며 말했다. 자신과 결혼해줘서 고맙고, 자신이 옆에서 함께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정확한 문구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무통주사로 인한 몽롱함 때문인지 출산을 기다리는 긴장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날, 그 순간, 신랑의 말은 9년간 연애를 하고 5년 동안 함께 살면서 들은 말 중 가장 내 마음을 울렸다.

  신랑의 진심 어린 말이 따뜻해서였을까. 분만실 침대에서 나도 신랑을 따라 따뜻한 미소를 짓자 따뜻한 기운이 팔, 손 끝까지 포근하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행복할 때면 옥시토신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한다. 그 호르몬은 출산을 촉진하는 호르몬이기도 하다. 내 하복부에 묵직한 고통이 느껴졌다.


  태동 측정기에 급격히 떨어졌다가 올라가는 아기의 심박동 그래프가 반복해서 나타났다.  아기의 심박동이 급격히 떨어질 때면 나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통증에 소리도 제대로 못 냈다. 마침 내진을 위해 분만실을 들렀던 조산사가 바로 분만 준비에 돌입했다. 이어서 3명의 조산사가 더 들어왔다. 조산사들은 내가 누워있는 침대를 분만용으로 바꿔 조립했다. 내 허리 위로 커튼을 치고 커튼 안으로 신랑을 들여보냈다. 조명도 어두워졌다. 아기가 나오려고 할 때면, 나는 아기의 타이밍에 맞춰 힘을 줘야 했다. 울락 말락 하는 신랑이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토닥거렸다. 5시쯤 조산사들이 분주해졌다. 의사에게 콜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지나 의사가 분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잘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힘주세요!”

아기의 진통에 맞춰서 조산사가 소리쳤다. 의사는 힘 빼지 말고 조금만 더 힘을 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힘을 더 줄 수 있을지 몰랐다. 배에 힘을 유지한 채 급하게 코 쪽 근육만 재빠르게 풀어 숨을 들이켰다. 준 힘을 놓칠까 봐 얼굴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얼굴과 배에 준 힘을 놓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했다. 그때였다.

      “응애~!”

몸이 그대로 멈췄다. 깜짝 놀라 신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신랑과 나는 Pause 버튼을 누른 영상처럼 그 순간에 멈춰버렸다. 곧 신랑이 내 얼굴을 안았다. 나는 울기 시작했고, 신랑은 내 얼굴을 안은 채 울었다.


2019년 11월 19일 오후 5시 16분에 일주일하고 하루 빠른 우리 아기의 첫째 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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