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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Oct 26. 2020

마름모가 고장 났다.

  의사의 어깨 넘어 하얀 벽을 뚫어질 듯이 쳐다봤다. 나는 고심 끝에 오전 8시부터 증상이 시작되었다고 대답을 했다. 나는 급하게 그때가 아기가 일어나는 시간이라고 덧붙였다.


  “8시요.”


의사는 굵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내 말을 확인하듯 말했다. 의사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타자기를 치고 난 뒤, 아기 목소리가 ‘색색’이었는지 ‘그렁그렁’이었는지 물었다. 나는 다시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가래 끓는 소리를 정확한 한글로 뽑아내는 능력이 내겐 없었다. 나는 의사 뒤쪽에 쌓인 책더미를 훑어 내리다가 타자기 앞에 놓인 의사 손 근처에 촘촘히 놓인 30여 개의 약통에 시선이 닿을 때쯤에 ‘색색’이라고 대답했다. 곧바로 ‘아마도’라고 했다가 또 잘 모르겠다고 했다가 다시 ‘색색’이 맞는 것 같다고 횡설수설했다.


  “색색이요.”


의사의 굵은 목소리가 마음에 울리는 듯했다. 의사는 내게 평소와 다른 게 있었는지 물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니까’로 시작한 말은 전 날 저녁 에어컨을 켜고 잔 이야기, 아기가 추웠을까 봐 걱정이라는 이야기, 에어컨을 수면모드로 설정하는 걸 깜박했다는 이야기에 이어 후회와 자책까지 늘어놓았다.


  “평소보다 에어컨을 많이 쑀다. 맞나요?”


의사의 바리톤 성악가 같은 목소리가 내 목소리를 누르는 듯했다. 의사는 안경 위로 눈을 올려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레이저를 쏘는 듯한 눈이 내게 그만하라고 압박했다. 나는 하던 말 그대로 입모양을 멈췄다. 입을 오므렸다가 짧게 ‘네’라고 대답한 후, 오른쪽 아랫입술을 깨문 채로 입을 다물었다. 의사가 타자기로 고개를 돌린 뒤, 나는 부끄러움을 털어내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아기가 아침부터 가래 끓는 소리를 내서 고민 끝에 오후 5시가 되어 병원에 방문한 날이었다. 무릎에 8개월 아기를 앉힌 채 의사와 마주 보고 앉아서 횡설수설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진료는 아기 상태를 찍어둔 영상을 의사에게 보여주고 끝났다. 우리 아이의 증상은 목이 건조해서 나타난 것이었고, 그 원인은 평소보다 오래 쐰 에어컨 바람이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의 가래소리는 ‘색색'이 아니라 ‘그렁그렁'이었다.


  요즘 마름모가 고장 난 것 같다. 알고리즘을 도식화하는 플로우 차트에서 마름모만이 여러 개의 출력선을 가진다. 인풋을 처리해서 출력선 중 어느 곳으로 아웃풋을 보낼지 결정한다. 요즘 내 마름모는 출력을 이상하게 하고 있다. ‘8시’에는 ‘아기 기상 시간’을 덧붙여서 내보내고, ‘색색’은 출력했다가 취소했다가 다시 출력하기도 하고, ‘에어컨을 많이 쑀다’에는 필요 없는 스토리를 줄줄이 출력했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진료실에서 쏟아내던 말이 부끄러워서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공대 출신이라고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대답하는 데 나름 자부심이 있었다. 같은 학교에서 공대를 졸업한 신랑과는 엉뚱한 대답을 할 때면 “정신 차려, 공대생!!”하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왜인지 이제는 엉뚱한 대답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아 수치심과 자괴감마저 들었다.


   현관 도어록을 열고 들어오면서 병원에서의 일을 잊으려 고개를 털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 거실에 들어서며 “잠깐만 기다려~” 하고 외쳤다. 아기띠 안에서 내 몸에 착붙어있는 아기를 내리면서도 “엄마 가방 내려놓고~”, “다했다! 이제 아기띠 풀자!” 하면서 혼잣말을 했다. 내 혼잣말을 듣는 아기는 입술 양옆으로 볼록했던 짱구 볼을 광대로 빵빵하게 올리면서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 광대도 빵빵하게 올라갔다. 아기를 향해 ‘그렇게 이쁘게 웃을 거야?’하고 대답 없는 대화를 했다.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부끄러움은 이미 잊고, 다시 이런저런 출력이 이어졌다.


  아기를 바닥에 내려주고 나서 핸드폰이 울렸다. 내가 전화를 받는 사이에 아기는 자기 몸의 5배도 넘는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 의자로 향했다. 전화를 한 곳은 체험 신청을 했던 이유식 업체였다. 이유식 체험 후 일주일 지나서 후기를 묻는 연락이었다. 전화기 넘어 남자는 통화 막바지에 앞으로 추가 이용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해보니까 편하고 좋긴 하더라고요. 그런데 애가 이유식 알레르기가 있는 편이라, 조금 걱정은 돼서… 그래도 매번 만들어 먹이니까 늦게 잤는데, 이거 시킨 날은 안 만들어도 되니까 일찍 잘 수 있어서 좋았거든요. 근데 매번 사서 먹일 것 같진 않아요. 병행해서 먹일 것 같아요. 일주일에 한두 번이나, 격주나… ”


  “아… 네, 상관없습니다. 만드는 거랑 병행할 계획이 있다는 말씀이시죠?”


멈출 기미 없이 이어지는 내 이야기에 조심스러운 남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잊었던 병원에서의 대화가 이 상황과 겹쳤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으며 핸드폰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얼굴의 반을 가렸다. 전화기 속 남자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는데도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그러게. 상관없는데,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지. 전화기 속 남자는 모를 나의 어색한 표정과 함께 통화가 끝났다. 전화를 끊고 나니 TV 소리 하나 없는 거실이 너무 조용하게 느껴졌다. 거실의 침묵이 코 끝과 입 앞까지 가득 찬 것 같았다. 마름모가 고장 났다. 무엇이 마름모를 이렇게 만든 걸까. 내 상념은 고요한 집이 그대로 삼켰다.


  “헤이 구글, 십 센티의 폰서트 틀어줘”


  거실의 침묵을 걷어내고 싶어서 인공지능 스피커에게 노래를 요청했다. 요청한 노래를 틀어주겠다고 스피커가 말하자 식탁의자 위에 있던 이케아 잡지를 뜯던 아기가 스피커로 고개를 돌렸다. 아기 얼굴을 보고 나니 방금 전의 부끄러움은 또 사그라들었다. 발랄한 템포의 음악에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 없는 아기에게 웃어 보였다. 사실 나는 마름모가 고장 난 이유를 알고 있다.


대화 상대가 있습니까? 내 마름모가 우선순위를 높여 처리하고 있는 건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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