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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나무 Sep 05. 2020

얼굴은 낯설고 목소리는 친밀하고

쌤! 국어 선생님이죠?^^

코로나19로 학생들 등교가 미뤄지자 자체 영상을 만들어 원격 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내신 시험이 입시와 직결되는 고등학교에서 EBS 영상만 제공하고  평가 문제를 출제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결국 직접 수업을 촬영해서 올리기로 했다.


파워포인트(PPT)에 사진과 영상을 넣고 목소리를 녹음하기도 고, 손으로 필기하면서 영상을 찍어보기도 했다. 기계음 예쁜 목소리로 소리를 입혀준다는 어플도 깔아보았다. 이런저런 방법을 배워 시도했지만 교실에서 수업하는 것처럼 만족스럽지 않았다.


결국은 아이 캔 노트(Icannote)라는 어플을 다운로드하여 한글이나 PDF로 저장된 본문 파일을 불러오는 것으로 길고 지루한 방황을 끝냈다. 여기에 학습지나 교과서 파일을 띄워놓고 와콤 등의 필기용 드라이버를 설치해서 수업을 하는  나에겐 잘 맞았다.


말이 쉽지 와콤을 설치하고 실행하는 기초적인 것도 기계치 교사였던 나에겐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요즘은 와콤도 번거로워 아이켄노트의  텍스트 기능을 활용해서 필기하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한 차시, 한 차시 영상을 힘겹게 제작해서 학생들에게 제공하던 어느 날이었다. 교무실 전화가 아주 끈질기게 울렸다. 받을 때까지는 끊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그런 벨소리였다.


원래 세 번의 벨소리가 울리기 전에 받으라는 게 복무 지침이었지만, 바쁜 업무 중이라 무시하고 싶었다. 인내심 있는 발신인이 얄미워 마지못해 받았는데  낯선 목소리의 학생이 매우 반가워했다.


 "어머, 쌤! (이건 학생이다ㅋ) 국어 선생님이시죠?"


다른 자리에 울린 전화를 당겨 받았으니 나에게 용건이 있는 게 아니란 건 분명했다.


"어~~ 누구니? 어떻게 알았어?"라고 물으니

"와, 신기하다~ 전화 목소리도 똑같네요." 한다.


그럼 내 목소리가 전화랑 영상이랑 다르겠니?라고 하려다가 목소리를 기억해주고 반가워하는 학생이 있다는 게 내심 고마웠다. 그래서 아주 친절하게 전화를 받으며  등교 수업 때 만나자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막상 등교를 시작하니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 학기가 다 끝나는 시점인데 아이들이 내 얼굴을 모른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니 수업 영상을 제공할 때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고, 등교 수업을 할 때도 마스크를 썼으니 얼굴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도 교무실에 와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선생님, 국어쌤어디에 계세요?"라고 찾거나

"그... 눈 큰 선생님(혹은 눈 작은 선생님)이요..."라고 눈 모양으로 선생님을 불러달라고 하면 너무 황당했다.

(직감적으로 내가 눈 작은 선생님인 걸 알았기 때문일까?)


생각해보니 내 목소리가 얼굴보다 더 예쁜 것 같아 그만 기분 나쁘기로 했다. 더 예쁜 목소리로 날 기억해 주는 건 감사한 일이니까.


엊그제 4교시. 또다시 울리는 전화벨.

게다가 4교시 수업이 없어 미리 식사 중이라 정말 받기가 싫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아주 사무적으로 용건만 전달하리라. 다짐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점심시간에는 급식실에서 고3 발열 체크를 해야 했기에 마음이 바빴다. 역시 발신인은 다짜고짜 "수학쌤 어디 계세요?"라고 물었다. 요즘은 쌍방향 수업 중이고, 실시간 출결에 반영되는 수업이므로  zoom이 끊겼거나 뭔가 다급한 상황인 것 같았다.


그래도 전화 예절도 없이 본인 신분도 안 밝히는 게 못마땅해서 다짐대로 아주 딱딱하게, 사무적으로 응대했다.


"자리에 안 계십니다. 30분 뒤에 전화 다시 주시겠어요?"라고.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은

 "에이~ 국어쌤!! 저 000인데 오시면 전화해 달라고 해 주면 안 돼요?" 한다.


오히려 얼굴 보고는 하나도 안 친했던 아이들이 목소리만 들으면 친밀감이 생기나 보다. 어느 자리에서 전화를 받아도 아이들은 내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어.... 그래... 전달할게~"라고 친절 모드로 다시 목소리를 세팅하고 응대했다. 급히 급식실에 내려가니 고3 학생을 반별로 따로따로 방송을 하면서 부르란다. 아이들이 한꺼번에 내려오면 거리두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방송 송출기에 대고 "3반, 4반, 5반 순서로 급식실에 내려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방송을 했다. 지나가던 교장선생님이 "방송 잘하네~"라고 뜻밖의 칭찬을 하신다. 작년 가르쳤던 고3 학생들은 "쌤! 오랜만에 선생님 목소리 들어서 반가웠어요~"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라디오 방송, 그런 걸 내가 매일 하고 있다.

매일 하는 일인데 잘할 수밖에.


오늘도 화면에 교과서를 띄워놓고 혼자 앉아 방송을 한다. 이제는 심지어 쌍방향 생방송이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날씨가 참 좋죠? 호호호~ 여러분 빨리 만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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