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었어요!(2탄)
생살을 찢었는데 사실은...
수술에서 회복이 되는 시간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내 옆에 누운, 내 뱃속에서 나왔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이 귀여운 아기가 옆에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게 위로가 되었지만 통증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얼마나 고통이 심하던지 이런 통증을 기약도 없이 참아야 하는 큰 병에 걸린 사람들은 차라리 안락사를 시켜주는 게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대학 때 안락사 논쟁에서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는 것은 아주 중대한 범죄"라며 핏대 세워 토론하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는 건 '존엄사'이고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누워서도 했을 만큼 참기가 힘들었다. 오죽하면 무통주사 기계가 돌아가고 있는데도 벽에 있는 비상벨 버튼을 여러 차례 눌렀다. 정말 많이 아프다고, 참을 수가 없다고. 잠을 자는 건 고사하고 숨을 쉬기도 힘들다고. 내가 20대 건강한 산모가 아니었으면 기절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을 사흘이나 겪었다.
간호사는 무통 주사 기계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곤 "애 낳았는데 당연히 아프지요." "엄마! 원래 아파요~"라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엄마라니. 내가 자기 엄마도 아닌데 "엄마"라는 단어는 모든 걸 인내하고 참아야 하는 건데 그걸 힘들다고 하니 엄마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들렸다. 억울함과 고통에 비명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모유수유를 해 가면서 3일이 흘렀다. 드디어 퇴원일이 다가왔고 다행히 극심한 통증은 조금씩 잦아드는 듯했다.
그런데 퇴원을 준비하며 무통주사 기계가 연결된 링거를 제거하던 간호사가 심하게 놀라는 게 보였다. 본인도 당황했는지 "어머!"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알고 보니 무통 주사액이 들어있는 기계 안의 진통제 기능을 하는 수액이 역류하여 거의 내 몸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렇게 고통스럽다고 비상벨을 눌러댔건만 겉으로 보기에 기계가 작동하고 있으니 당연히 수액이 몸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누구 하나 기계를 열어 수액이 줄고 있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제왕절개 수술은 생살을 잘라 아기를 꺼내는 것인데, 수술 후 통증을 진통제가 들어가지 않은 채로 견뎌냈으니 지금 생각해도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둘째를 제왕 절개하고 나서 전혀 불편함이 없던 것과 비교하면 의료 사고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병원 측 대응은 일관성 있게 실망스러웠다. 무통 주사액이 3일 간 몸에 들어오지 않은 게 확인되었으니 주사액 비용을 돌려주겠다는 게 전부였다. 안 겪어도 되는 고통에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멱살이라도 잡고 소송까지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착한 게 무기인 친정 엄마가 말렸다.
좋은 일에 (큰아이는 양가의 첫 손주였다.) 괜히 분란을 만들지 말자고 했다. 그렇게 생살을 찢은
고통은 주사액 몇만 원으로 퉁 치게 되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울화가 치미는데 그런 감정에 휘둘릴 새도 없이 아기는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조리원에 도착해서는 애써 고통을 잊고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모유도 성분이 좋을 것 같아 금세 잊고 수유를 하며 내가 아는 모든 축복의 말과 노래를 해주었다^^
오죽하면 옆방의 산모가 나에게 무슨 기운이 있어서 아기한테 쉬지 않고 말하고 노래하냐며, 여기서는 엄마도 좀 쉬고 잠도 자야 한다고 충고했다. (옆방 엄마 미안~^^;;) 산후조리원에는 거의 매일 양가 부모님이 방문하셨다. 그때마다 지겨운 산모식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초코 도넛을 주문할 수 있어 좋았다.
첫아이는 가족 모두에게 기쁨이고 축복이었다. 아기 출산할 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이렇게 생생한데 벌써 중학생이 된다니. 곧 사춘기가 되어 반항이라도 하게 된다면 이 이야기를 보여줘야겠다. 내가 이렇게 배 아파 널 낳았다고. 널 이렇게 사랑했었고 지금은 낳은 정에 키운 정까지 보태져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무도 안 궁금한, 나와 아이를 위한 1번 출산 스토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