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결혼과 동시에 찾아와 둘째도 마음만 먹으면 생기는 줄 알았다. 당당히 교감선생님을 찾아가 곧 둘째를 낳을 거라고 했다. 임신을 하면 담임이 어려우니 꼭 비담임으로 배정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게 교직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비담임이었다.
곧 임신을 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비담임 보직까지 얻어냈는데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한 달 한 달 초조하게 시간만 흘렀다. 계획은 2월 임신이었는데 다음 해 2월이 될 때까지 소식이 없었다. 사람들이 괜히 수군대는 것 같았다. "임신한다고 비담임 달라더니, 왜 애가 안 생긴대?"라고할 것 같아 민망했다.
나중에는 하나면 어때, 그냥 하나만 잘 키우자고 다짐했지만 첫째를 보면 그렇게 외로워 보였다. 아이 하나가 있어도 이렇게 난임이 고통스러운데 그걸 여태 몰랐다는 사실, 첫아이가 바로 생긴 게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상심의 시간을 보내던 중 아이의 주일학교 예배에서 '한나의 기도'라는 성경 말씀을 들었다. 선생님도 난임으로 고통받던 기억이 있으셨나 보다. 갑자기 한나가 울면서 태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는 부분에서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도 내 상황과 너무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라 감정이입이 되어 그야말로 한나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태의 문을 여는 것이 내 노력이 아님을 고백하며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리고둘째가 찾아왔다. 이름을 사무엘(한나의 아들)이라고 지었어야 했나. 남편의 뜻대로 "다니엘"이 된 우리 둘째는 미국에서 태어났다. 둘째가 아들인 것을 확인한 후 남편의 유학 준비에 가속이 붙었다. 기왕 공부하러 가게 된 것, 가서 아들을 낳으면 미국 시민권도 얻게 되니 아이 장래에 무슨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만삭의 임산부는 비행이 어려우니 적어도 배가 불러오기 전에 유학을 가야 했다. 임신 소식을 알고 6개월 내 미국에 도착했으니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먼저 유학생활을 하던 친구 부부가 병원과 의사를 모두 소개해주어 7월에 순조롭게 출산을 했다.
둘째 출산은 너무 평안했다. 4월부터 주치의가 되어 매달 진료를 해주셨던 친절한 백인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께서예정된 날, 예정된 시간에 수술해 주셨다. 첫째 수술에 큰 겁을 먹었던 나는 남편과 수술실에 함께 들어갈 수 있어 마음이 편안했다. (미국은 수술실에 부부가 함께 들어갈 수 있다.)
차가운 수술실이 아니라 에어백 같은 튜브가 내 몸을 감싸고 따뜻한 바람이 나와 몸을 녹여주었으며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비싼 의료비가 흠이긴 하지만, 마음을 녹이는 친절한 서비스가 끝이 없었다. 이렇다 할 통증도 없이 둘째가 태어났고,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기운차게 모유를 찾아 먹었다. 첫째만큼 사랑스러운 아이가 또 생긴다는 게 믿기지 않았는데 둘째는 사랑이었다. 아이가 많으면 사랑이 나뉘는 게 아니라 그만큼의 사랑이 또 생긴다는 걸 실감했다.
산모식으로는 샴페인과 스테이크, 맛있는 감자칩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샌드위치와 탄산음료도 언제든 제공되었다. 이게 산모식이라니 너무 웃겨서 사진도 많이 찍었다. 고통 없는 수술과 수술 후 처치가 200프로 만족스러웠다. 이대로라면 셋째도 낳을 수 있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이래서 말이 중요하다.)
하나 아쉬운 점은 혹시 퇴원할 때 간식 비용이 어마 무시하게 청구될까 봐 배가 고파도 냉장고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고 참은 것이다. 간호사가 와서 스낵 좀 꺼내 먹어라, 샌드위치 줄까 물어봤지만, 팍팍한 유학생활을 생각하며줄기차게 거절했다.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오신 시어머니표미역국과 미국식 산모식만 먹어가며 3일을 보냈다.
퇴원을 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냉장고 안의 모든 음식, 샌드위치, 음료, 과자가 사실은 병원비에 포함된 "공짜"였다는 사실. 먹든 안 먹든 비용은 같았다는 사실.
아~ 그래서 사람들이 막 음료수 계속 꺼내먹고 그랬구나.
괜찮아, 그래도 우리 둘째는 공짜처럼 쉽게 낳았으니까. 사랑하는 둘째가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또 한 명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