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막내는 엄마 놀래키기를 좋아한다. 퇴근할 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현관문을 열 때 중문 뒤에 숨었다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웍!" 하는 소리와 함께 괴물처럼 튀어나오면 내가 비명을 지르며 놀라기 때문에 그 반응이 재밌어서 어쩔 줄 모르고 깔깔거린다.
우리의 첫 만남도 그랬다. 내 사전에 아이 셋은 없었고, 둘째도 어렵게 가진 터라 이제 끝이라 생각했다. 아들 둘을 키운 엄마에게 "하나 더?"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흔들 뿐 아니라 화를 내며 멱살을 잡을지도 모른다. 겨우 둘째가 기저귀를 떼고 잠시나마 엄마와 떨어질 수 있는 시점이었다.
아이를 잠시라도 기관에 맡기고 영어 공부를 할까, 유치원에 보내고 취미생활을 할까 기대에 부풀 무렵, '서프라이즈 선물'이 도착했다. 지금까지 미안한 건, 그날 우린 첫째와 둘째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처럼 환호성을 지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자주 놀라는 소리를 지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격하게 환영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겠지?)
'당황스럽다'는 말보다 적합한 표현을 모르겠다. "이제 어쩌지?"라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둘째 출산 때수술해 주셨던 의사 선생님이 같은 병원에 근무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약을 잡았다. 은퇴가 얼마 안 남았다고 했는데, 계신다는 소식이 그나마 한 줄기 빛이었다. 너무 다정하셔서 믿음이 가는 분을 다시 만난다는 안도감에 첫 진료를 받았다. 미국은 병원에 자주 갈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한국이라면 이미 성별이 나왔을 시점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후진 흑백 초음파 기계를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피넛(peanut)"을 외쳤다. 응? 몸속에 땅콩이 있다고? 알고 보니 남자아이의 소중한 부위를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아니, 뭘 봤다고? 동양인이 아들을 좋아한다는 상식을 가진 분이었는지 계속 남자아이라고, 산부인과 의사 경력이 30년이라 90% 확실하다는 쓸 데 없는 말도 덧붙였다.
아들 셋. 아들 셋. 아들만 셋. 우리 부부는 서로를 위로할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침묵 속에 비가 내리는 고속도로를 뚫고 나가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다. 그날만큼은 우리가 좋아하는 쌀국수라도 먹어야 위로가 될 것 같았다. 먹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계속 그랬다. 비가 내리는 것처럼, 안개가 끼어 막막한 것처럼.
나도 딸 하나 낳아서 아이가 크면 예쁜 카페에 가서 같이 커피도 마시고 디저트도 먹는 게 소박한 꿈이자 기대였다. 엄마 말에 공감도 해주고 내 편도 들어주는 그런 딸 하나 갖고 싶었다. 남편도 "야무진" 여자아이 타령을 하면서 딸 하나 낳자고 농담을 자주 했었다. 그런 기대로 셋째가 생겼다는 서프라이즈 소식을 듣고도 버틸 수 있었다. 우리의 소박한 꿈은 성별을 확인한 순간 무너져 내렸다.
한국에 있는 오빠네도 새언니가 둘째 임신 중이었는데 첫째가 딸이라 둘째는 아들을 바랐건만, 또 딸이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친정 엄마는 너네 아기들 둘 성별이 딱 바뀌면 좋겠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둘의 성별이 바뀌기를 기도한다고 하셨다. 참나, 한국의 초음파 기계는 얼마나 좋은데. 성별이 동시에 바뀌길 바란다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동시에 한국의 조카와 우리 아기의 성별이 바뀌었다. 배가 부를 대로 불렀을 때 "어머, 아들이 아닌데요? 어머나, 딸이 아니네요?" 하는 소식을 동시에 들은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딸내미는 언제든 나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언제든 괜찮으나 본인이 일 년에 딱 두 번 쉬니까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그 날만 피하면 10분 내로 호출받고 달려오겠다고 하셨다.
예정일보다 2주 전에 수술을 잡는데,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12월에 아기를 낳으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우리 막내는 엄마 놀래키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필 딱 추수감사절 전날 밤, 진통이 시작됐다.
아들 둘을 내리 수술했기에 진통이 정확히 어떤 건지 몰랐다. 아프다 안 아프다 하는 주기가 있는 걸 보니 진통이 맞는 것 같았다. 이대로 진통이 심해지면 추수감사절 당일에 아기를 낳아야 할 테고, 그동안 진료를 봐주셨던 전문의 선생님의 휴일을 정확하게 맞추게 될 판이었다.
세 번째 제왕절개라서 진통을 내버려 두었다가는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어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추수감사절 전날에는 자궁문이 많이 열리지 않았다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돌아온 날 밤, 다시 진통이 찾아왔다.
이럴 때마다 병원에 가야 하나, 어제도 돌아가라고 했으니 오늘은 참아볼까 갈등을 하다가 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Thanksgiving Day(추수감사절) 밤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진짜였다.
간호사도 당황하며 의사 선생님 호출을 시작했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진통은 계속 몰려왔고, 일단 자궁이 수축되면 아기가 나올 수 있으니 자궁이 수축되지 않도록 막아보겠다고 했다. 긴급하게 상황이 돌아가며 "자궁수축 억제제 "라는 주사를 맞았다. 나오려는 아기가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 게 최우선이었다.
밤새도록 아기가 괜찮기를,의사 선생님이 전화를 받으신 후 진통이 다시 시작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오전 7시쯤 되어서야 나보다 더 놀란 듯 보이는 의사 선생님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다급한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둘째 때까지는 수술이 두렵기만 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이젠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흰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이 정말 천사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Thanksgiving Day(추수감사절)에 의사 선생님은 일 년에 두 번뿐인 휴일을 제대로 즐기셨단다. 미식축구를 보며 맥주를 마셨고, 취해서 깊이 잠든 사이 내 진통이 시작되었나 보다. 의사도 참 힘든 직업이란 생각이 든다. 모처럼의 휴식이 환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으니.
다행히 수술이 진행되고 막내딸이 태어났다. 야무진 막내딸, Lilly의 탄생은 진짜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 아이가 자랄수록 어찌나 사랑스럽고 귀여운지 "너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니~"라는 말을 가족 모두가 달고 산다.
아무도 안 궁금한 우리 막내 출산기. 세 번의 제왕절개로 회복이 어려웠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결국 딸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