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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나무 Nov 05. 2020

교권은 사라지고 양아치 인권만 남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 교육에 미래가 없다.

문제에 오류가 있다며 시험이 끝난 지 일주일이나 지난 시점에 낯선 이에게 연락이 왔다. 본인의 신분은 밝히지 않고, 시험을 본 학생이 자신의 조카이며 본인은 현직 국어 교사인데 육아휴직 중이라 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국어 교사의 질문이라고는 어색하게 논리적이지 않았다. 아무리 차분하게 왜 A가 답이 아니라 B가 답인지 설명해도 본인의 억지 주장만 펼쳤다.


아예 본문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받았다. 당연히  이 사람은 조카의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 본 열혈 이모가 아니라, 잘못 가르치고 수강생을 잃은  학원 강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시험 직후 채점을 하고 단 한 명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지만, 주말에 학원을 다녀온 후 태도가 돌변했다. 한 학생이 강사의 설명을 그대로 따라하며 A가 답이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국어과 선생님들이 수차례 회의를 하고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아도 B가 답이었다.


너네 학원 선생님이 A라고 하셨니? 젊은 여자 선생님이지?라고 떠 보니 모두 맞다고, 이번 시험을 망쳐서 학원을 끊었다고 하며 학원 이름까지 전해 주었다.


그리고 또다시 걸려온 전화. 왜 민원에 피드백이 없으며 성적관리위원회를 열지 않느냐는 항의였다. 다짜고짜 교감 선생님께 연락을 했나 보다. 문제가 없는 문제를 해명하러 교감선생님께 또다시 설명을 드려야 했다.


피드백할 테니 학생 이름을 알려달라 해도 알려줄 수 없다며 본인의 신분도 철저히 속이던 민원인.  그 원장의 무식함을 폭로하고 업무 방해 등의 사유로 고소하고 싶었다.


교감 선생님께는 한 번만 더 전화가 오면 학교로 그 사람을 불러 달라고 했다. 문제에 오류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제발 정체를 드러내길 바랐다.


하지만 다시 보니 문제가 없었는지, 아니면 말고 식의 민원은 거기서 끝이 났다. 언제부턴가 학교가 민원에 예민하게 반응하자 학원이 학교를 우습게 보고 있다.




학생도 학교를 우습게 여긴다.


최근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를 깨운 여교사가 중학생 아이의 무차별 폭력에 노출되어 얼굴뼈가 함몰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제 이런 민망한 사건은 뉴스거리도 아니다. 감정조절 못하는 아이들은 남의 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휴대폰에 중독되어 분노 조절을 못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밤새 게임을 하고 학교에 와서 자는 아이, 지도할까 말까.

요즘 교사들 사이에서 정답은 "내버려 두기"이다.


괜히 건드렸다가 욱! 해서 아이가 난동을 피우면 고스란히 그 피해는 교사가 떠안게 된다. 수업을 방해해도 복도로 쫓아낼 수 없다. 학생의 수업받을 권리 때문이다.


시대에 가장 지혜로운 교사는 자든 말든, 욕을 하든 말든

담배를 피우든 말든, 수업시간 휴대폰을 하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는 교사다. 내버려 두다가 정년을 채우고 연금이나 받으면 될 일이다.


지도하다가 버릇없이 대드는 학생에게 감정 조절을 못하고, 한 대 때렸다가 징계를 받았다는 동료 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더 "지도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럼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


공부하고 싶은데 떠드는 아이 때문에 공부할 수 없고,

쾌적한 화장실을 이용하고 싶은데 간접흡연에 매일 노출되고, 규칙을 지키고 싶으나 그렇지 않은 아이 때문에 피해를 받는 상황이 반복되어 정신질환까지 앓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착한 아이들의 인권과 열심히 지도해보려는 교사들의 교권은 사라지고, 양아치 흉내나 내는 아이들의 인권만 보장되는 현실에 분개한다.


오늘도 학교 벤치에서 당당히 흡연하다 걸리고 라이터만 있다고 우기는 아이의 교복 주머니를 뒤질 수 없었다. 갖은 협박과 회유로 담배를 압수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쏟은 에너지가 너무 커서 예쁜 아이들과의 상담 시간을 빼앗기고 말았다.


사실, 학교에는 예쁘고 예의 바른 아이들이 훨씬 더 많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선생님을 따르는 순수한 아이들이 더 많다. 이 아이들의 인권을 지켜주고 싶다.


교권은 사라지고 양아치들의 인권만 계속 지켜준다면,

한국 교육에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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