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다이어리 001
우리 엄마는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큰이모 > 엄마 > 작은이모 순이다. 나는 왜인지 어렸을 때부터 심적으로 작은 이모를 제일 가깝게 느꼈다. 나와 나이차가 가장 적게 나기 때문일까. 심지어 나는 엄마와 2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그녀를 동년배라고 인지하는 지경이었다. 내 속에는 큰 이모와 엄마, 작은 이모와 나 사이에 팀을 나누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었다. 나풀거리는 블라우스를 자주 입는 큰이모와 항상 출근용 정장 차림이었던 엄마는 나와는 아주 먼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주로 캐릭터 티셔츠를 입는 작은 이모는 내 친구 같았다.
이모는 컴퓨터를 다루는데도 능숙했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생이 되면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한다지만 90년 대생들은 대체로 컴퓨터를 사달라고 졸랐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의 온 관심은 몰컴이었는데, 엄마 아빠는 매일 내게 2시간이라는 사용시간제한을 두었고 내 게임 캐릭터의 레벨을 높이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밤마다 엄마 아빠가 잠에 들면 몰래 이불을 걷어내고 방으로 가 본체 전원 버튼을 눌렀다. 누름과 동시에 호다닥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컴퓨터가 켜지며 내는 위잉 소리를 감추기 위해 변기 레버를 서둘러 내리기 위함이었다. 변기 소리에 어렴풋 잠에서 깬 엄마 아빠는 내가 잠시 화장실에 갔구나 생각하고는 이내 다시 잠들고 만다. 하지만 아무리 몰컴 시간을 늘려가며 게임을 해도 작은 이모한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맞벌이인 엄마, 아빠덕에 나는 자주 이모집에 가서 놀았는데 이모에게는 나보다 네 살 어린 아들이 있었다. 이 꼬마는 원대한 목표에 비해 게임 실력이 형편없었다. 금이야 옥이야 외동아들의 게임 목표 달성을 위해 작은 이모가 전면에 나섰다. 이모는 아이큐가 137이다. 게임과 아이큐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냐 싶겠지만 당시 초딩이었던 나는 우와 역시 이모는 똑똑해하며 갈 때마다 불쑥불쑥 올라있는 게임 레벨에 감탄하고는 했다.
성인이 된 현재에도 여전히 나는 이모에 대한 마음의 거리를 아주 가깝다고 느낀다. 자주 만나지도 자주 연락하지도 않지만 이모를 떠올리면 어쩐지 명랑한 기분이 드는데 이 친근한 이미지를 상시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아무래도 이모의 말투 때문이라 추측한다. 이모네 가족(이모, 이모부, 사촌동생)과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러 집을 나선 길이었다. 연휴 탓인지 도로에는 차들이 아주 많았고 한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우리는 모두 더 빨리 더 먼저 가려고 대결을 하는 중이었다. 정정당당을 고수하던 이모부는 가족 나들이라는 취지를 상기하며 화를 꾹꾹 누르고 있었는데, 그의 앞으로 '선 끼어들기' '후 깜빡이'를 넣는 운전자가 등장해버렸다. 더 이상 참는 것은 무리였는지 이모부는 !@#$!@#$% 하면서 분통을 예열하기 시작했고 이를 본 이모는 조수석에서 응원가 부르듯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끼워줘! (짝) 끼워줘! (짝) 급속도로 귀여워진 분위기 탓에 이모부는 별수 없다는 듯 풋 코웃음을 털어내곤 차간 거리를 벌려주고 말았다.
사촌동생은 이모부의 아들답게 갈수록 거구가 되었다. 현재는 자기 아빠를 뛰어넘어 183cm에 100kg의 몸매(이 글을 볼일은 없겠지만 공개 미안)를 유지하고 있다. 사촌동생과 내가 주 사회 활동층이 되어가면서 이모는 익숙했던 세상과 조금씩 멀어져 갔다. 컴퓨터를 배우지 않고도 능숙하게 다루던 과거의 영광과는 달리 스마트폰 세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종종 아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모가 몇 차례 버벅거림을 반복하고 나면 그녀의 아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몇 번을 알려주는 거냐며 타박을 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나는 괜히 허공에 대고 아들 키워봐야 소용없다니까~ 외치며 이모를 대신해 반사신공을 시전하지만 그녀는 조카의 복수로는 성에 안 찬다는 듯 자신의 아들을 향해 직접 소리친다. 이 뚱땡이가!!!
세 자매는 모태 비육식주의자이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비육식에 담긴 신념은 없으니 비육식식단가이다. 태어나보니 고기를 먹지 않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세 자매가 마른 체형인 것은 아니다. 그녀들은 단백질 대신 탄수화물을 억수 먹었다. 이런 식습관을 가진 이모덕에 평소 고기 외식을 잘하지 못하는 이모부는 내가 오는 날이면 당당히 회와 고기를 사 먹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D-day 아침부터 분주히 여러 가게를 방문해 공수한 포장 음식들을 한상 가득 차려 놓은 뒤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는 이모부를 보며 이모는 노래한다. 세~상에~뚱~땡~이가~너~무~ 많아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뚱땡이라는 단어가 꽤 맘에 들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이 미운 짓을 하면 속으로 외치곤 한다. 이 뚱땡이가!! 나에게 온 뚱땡이라는 단어는 뚱뚱하다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상대를 심각하지 않게 나무라고 싶을 때 내뱉는 상징어다. 뚱땡이는 친한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너는 사랑하지만 너의 미운짓은 뚱땡이야 하는 느낌이다. 이 이상 잘 설명하지 못하겠다. 아무튼 속으로 혼자서만 외쳤음에도 미운짓에 대한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까지 아주 신비하고 사랑스러운 주문이다. 이 주문을 알게 되어 기쁘다. 내 이모는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