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다이어리 002
돌이켜보면 나는 천성이 이과다. 인과가 있어야 이해하고 늘 납득가능한가 되묻는다. 머리로 목차가 그려지지 않으면 아예 기억을 상실한다. 새로운 상황을 맞닦들이면 감정의 틈바구니 어느 위치에 넣어두어야 할지 차곡차곡 헤아려본다. 본능적으로 그랬다.
내 기억 속 엄마 아빠는 맞벌이였지만 맞벌이가 아니었다. 일용직을 전전하는 아빠는 돈을 벌어오진 못했지만 나를 온전히 돌보지도 못했다. 경제적 가장이었던 엄마는 아빠가 죽기 전인 내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아무런 애착이 없어 특별한 기억도 없다. 때문에 대부분의 기억속의 나는 항상 혼자였다. 초등학교 1학년 부터 스스로 밥을 챙겨먹었다. 계란후라이를 부치거나 라면을 끓이는 일은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 아빠에게 거리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나는 굉장히 낙천적인 타입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스스로 밥을 챙겨 먹고 티비도 보고 만화책도 보다가 엄마 아빠가 귀가하면 끈덕지게 달라붙어 하루종일 있었던 일에 대해 떠들었다. 아빠는 내가 학교에서 받아온 알림장을 훑은 뒤 나와 같이 그림을 그리거나 일기를 썼다. 외로웠던 기억은 없다.
생각해보면 엄마 아빠는 상 경상도 사람이다. 외동딸 유치원 졸업식도 오지 않고 초등학교 입학식도 오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에도 중학교 졸업식 사진에도 없다. (사진에는 할머니와 이모들 사촌들만이 남아있다.) 나는 그것이 섭섭하지 않았다. 나도 엄마 아빠의 딸인 탓일까. 바빠서 미안해 하면 그렇구낭 알겠어 싶었다. (올 수 있냐 물었던 기억도 없다.) 운동회 날이나 참관수업에 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붙임성 좋게도 친구네 돗자리에서 하하 호호 하며 잘도 놀았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창피하지도 않았다. 급작스럽게 비가 오는 날이면 친구네 엄마들은 하굣길 대문 앞에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나는 내 몸통보다 큰 책가방을 머리 위로 메고서 나와 비슷한 사정의 친구들과 꺅꺅 거리며 비를 맞고서 집으로 뛰어가곤 했다. 오히려 비를 맞는 우리를 엄마 손을 잡고 우산을 쓴 친구가 부러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장마가 절정을 이루는 한 여름이었다. 2교시 수업부터 갑작스레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창 밖으로 태풍이 내리치는 것을 보며 우와 엄청나다하고 생각했지만 집으로 어떻게 돌아갈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의 종례 말씀이 끝나고 학교를 나서는 복도 밖 창문으로 교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어른들이 보였다. 야 너네 엄마다! 너네 엄마도 왔다 얼른가! 말하자 친구들은 후다닥 뛰어가 엄마~! 하고 외치며 제자릴 찾아갔다. 그 날따라 태풍의 강도가 셌던 탓인지 평소에 같이 책가방을 머리 위로 둘러 메고 뛰어가던 친구들도 모조리 부모님이 데리러와 먼저 집에 가고 없었다. 나는 털레털레 건물의 정문 앞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지금 뛰어야 할지 조금 더 버티다 뛰어야 할지를 가늠해보고 있었다. 그 때 였다. 저 멀리서 전~다영!!! 하면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정 가죽자켓을 입은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였다. 그는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러댔다. 그가 가까워지자 흐릿했던 얼굴이 선명해졌다. 그를 알아보자마자 나는 단숨에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환한 얼굴로 나를 들어올려 안았다. 그는 내 아빠였다. 내가 너무 신이 난 탓에 우리는 같이 쫄딱 젖고 말았다. 아빠에게 뛰어올라 부비부비를 하는 동안 우산을 들고 있던 그의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아버린 것이다. 아빠가 나를 데리러 옴으로서 하나였던 비에 맞은 생쥐가 둘이 돼버렸다. 딸을 비바람으로부터 막아내려는 발걸음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딸의 마음속에는 충만한 어떤 것이 가득 차올랐다. 딸은 집에 돌아와 비에 젖은 몸을 씻으며 생각했다. 나는 오늘이 제일 행복한 날이야. 기분이 최고로 좋은 날이야. 내 행복의 기준은 오늘이야.
이후로 어떤 행복한 일이 닥쳐도 나는 늘 이 날을 기준삼아 행복 순위를 매기곤 했다. 검정가죽자켓보다 행복해? 더 위에 수납할 수 있어? 아쉽게도 비오는 날 검정가죽자켓을 입은 나를 데러리온 남자 - 보다 행복한 기억은 아직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