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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아빠 Aug 05. 2019

순진한 인턴 뒤통수 제대로 맞았네

간신히 여의도 서식기_일곱 번째: 첫 선거 경험기

선거를 빼놓고 국회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행사는 선거고, 그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구성하는 것이 국회이기 때문이다. '선출된 권력'이라는 점은 국회가 일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하는 전부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총선이라고 불리는 국회의원 선거가 선거의 전부는 아니다. 국회에서 선거는 일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의원들끼리는 원내대표를 뽑는다. 국회의장과 부의장, 상임위원장도 국회의원들이 선출한다. 이런 선거가 있을 때마다 후보로 나온 국회의원들은 바쁘게 의원회관을 돌아다니면서 유권자인 국회의원과 인사라도 한번 더 하려고 분주하다. 


이뿐 아니다. 정당에서는 당 대표와 같은 지도부는 물론, 시도위원장, 여성위원장, 청년위원장 등등을 당원들의 투표로 선출한다. 심지어 각 정당 보좌진들의 모임인 보좌진협의회도 회장을 회원들의 투표로 선출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선거가 열리는 곳. 그곳이 국회고 여의도다. 끊임없이 구성원들의 의사를 묻는 것, 사람을 선택함으로써 정당과 단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국회에서 일한다는 것은 좋든 싫든 선거에 연관된다는 것이다. 국회에서 일한다면 선거를 피해 갈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선거가 힘들었다. 나와는 잘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피폐한 분위기, 사람의 진을 빼고 마음을 시들게 하는 듯한 기운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선거가 적성에 잘 맞는 사람들도 많고, 또 선거를 즐기는 것은 국회에서 일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할 것이다. 나도 정말 내가 좋아하는 후보를 위한 선거에 참여할 때는 주저되는 마음 없이 선거캠프에서 활동할 수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선거라는 것이 힘들었고,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국회에서 일했던 것은 신기하기도 하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하간 선거라는 건 참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내가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했던 것은 당내 선거였다. 인턴으로 일했던 의원실은 당시 여당인 열린 우리당의 비례대표 의원실이었다. 2005년 4월 2일 열린 우리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문희상 의원을 당의장으로 선출했다. 보통 전당대회를 통해 당대표를 뽑기 전에 전국을 돌면서 당대표 후보들은 정견발표와 선거운동을 하고, 지역별로 시도 위원장을 뽑는다. 당시 3월 27일에는 서울시당 대회가 열려 서울시당 위원장을 뽑았는데, 유인태 의원이 당선됐다. 


나는 바로 이 서울시당 위원장 선거에 투입됐다. 당내 선거에는 후보와 뜻을 같이하는 의원이 보좌진을 파견해서 선거를 돕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유인태 의원과 경쟁을 벌였던 김한길 의원 캠프에 파견됐다. 정말 잘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 보좌관이나 비서관을 파견했을 텐데 인턴을 보낸 걸 보면, 관계가 있으니 도와줬다는 생색은 내야 한다는 의무방어 차원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명을 받아 첫 캠프 회의에 참석했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김한길 의원 보좌관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의원과 무언가 논의를 하고 있었다. 의원은 잠시 인사만 하고 떠나고 각 의원실에서 모인 보좌진들이 모여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캠프에서 조직을 맡은 보좌관도 아무것도 모르는 인턴이 파견 나온 게 답답했는지 나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는 쫄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의지도 다졌다. 


사람이 없어서였는지 내게도 한 지역위원회를 담당하는 역할이 떨어졌다. 서울시당 위원장을 뽑을 투표권이 있는 지역위원회의 대의원들을 지지자로 만드는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막막했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일을 시작했다. 어떻게 선거운동을 하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 채 맨땅에 헤딩이 시작됐다. 


대의원들에게 전화를 해, 최대한 공손하게 내 소속과 전화를 한 이유를 밝혔다. 무엇보다 전화로만 끝내지 않고 모든 사람을 직접 만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전박대하듯 전화를 받는 사람, 바쁘다는 핑계로 끊는 사람, 영혼 없이 심드렁하게 응대하는 사람, 살갑게 받아주는 사람 등 다양한 반응을 접했다. 내가 하고 싶다고 자원을 한 일도 아닌데 박대를 당할 때는 유쾌하지 않았지만 멘털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교회 다니면서 어릴 때 노방전도를 나가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고, 자원봉사로 사회복지 단체에서 후원요청 전화를 돌린 게 도움이 된 거 아닌가 싶다. 역시 세상 살면서 겪는 경험은 모두 도움이 된다.


수십 명의 모든 대의원들을 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꽤 많은 대의원들을 직접 찾아가 만났다.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건축업자, 집에 있는 주부, 가게에 있는 자영업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고, 부러 찾아온 사람 박대 못하는 법인지 전화로는 "바쁜데 뭐하러 찾아오냐"라고 했던 분들도 채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가 직접 찾아가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지지를 부탁하니 측은해서인지, 기특해서인지 잘 대해주셨다.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걷고 또 걸으며 열심히 다녔다. 후보들이 지역위원회를 돌며 정견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당시 후보와 함께 온 보좌관에게 한 아주머니가 "이 젊은이가 집까지 찾아오고 열심히 했어요"라고 이야기도 해주어서 고마웠다.


2005년 3월 한 달 동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실천해 발품을 팔면서 많은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의 국회 생활에 크나 큰 영향을 미친 사건도 겪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대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리고 찾아가 만났다. 그중에는 꽤 큰 규모의 식당을 하는 분도 있었는데, 나에게 너무도 상냥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약속을 하고 찾아가 쭈뼛쭈뼛 인사를 했는데 "아이고 젊은이가 고생이 많네"하면서 나를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방으로 안내했다. 탁자에 놓인 주전자의 육수를 내 앞의 컵에 따라주면서는 종업원에게 "여기 냉면 하나 내와라"라고 지시까지 했다. 


"어린 나이에 힘들 텐데 내 (지지) 걱정은 하지 말고 냉면 한 그릇 먹고 편히 있다 가라"는 말 한마디가 너무 고마웠다. 멘털이 흔들리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막막한 심정으로 나보다는 한 세대 위인 대의원들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았던 터에 따뜻한 말 한마디와 위로는 마음을 스르르 녹아내리게 했다. 거짓말 안 보태고 눈물이 핑 돌았다. 


냉면이 나온 후 그가 내게 젓가락을 챙겨 주고는 내 맞은편에 앉아 이것저것 물어봤다. "선거운동은 힘들지 않은지, 잘 되는지, 판세는 어떤지" 등등. 그리고 자기가 수십 년 당원이라면서 이것저것 조언도 해주었다. "이 사람을 만나봐라,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다들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니 잘 말해주겠다" 등등. 나는 모든 마음의 경계를 풀고 '이렇게 마음 좋은 분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진솔하게 대화를 했다. 그리고 약 한 시간여 나는 몸과 마음이 모두 안식을 얻은 힐링의 시간(?)을 보내고 90도로 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왔다. 


며칠 후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분이 그 지역에서 상대 후보의 핵심 지지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순진한 청년을 잘 구슬려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뒷골이 서늘했다. 물론, 내가 무슨 엄청난 정보를 넘긴 것은 아니었다. 인턴 나부랭이인 내게 그런 정보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한 대부분의 얘기는 차가운 반응을 보이는 분들에 대한 어려움, 사회초년생으로서의 애로, 정치에 대한 개똥철학 이런 것들이었다. 후에 생각하니 언뜻언뜻 "이 녀석한테 뭐 별 얘긴 없네"하는 눈빛이었던 게 생각났다. 그는 아마도 내게 내놓은 냉면 한 그릇이 아까웠을 것이다.


그래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정치판이 이런 곳이구나 하는 걸 아주 분명하게 한방에 배운 경험이었다. 세상이라는 게 만만치 않은 곳이라는 것도 배웠고,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슬픈 진리도 깨달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는 경험이지만, 당시에는 그 호의에 고맙기만 해서 눈물까지 글썽였던 내가 너무나도 한심했다. 


이 경험은 내 국회 생활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일로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쉽게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나 전략을 내보이지 않고 신중하게 행동하게 됐다. 예의를 갖춰 사람을 대하지만, 상대의 의도나 실체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분명하게 판단이 설 때까지는 가벼이 움직이지 않는 자세가 생겼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됐다는 역효과로 이 사건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일일이 다 제대로 알기 힘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여러 가지 이해관계 속에서 일을 해나가야 하는 업무의 특성상 초창기에 호되게 겪은 이 사건은 입과 행동이 무거워야 한다는 교훈을 내게 준 사건이다. 당시엔 뒤통수를 맞은 일이었지만, 국회에서 일하는데 예방주사가 된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이런 일을 겪으면서도 하던 대로 열심히 했다. 위 사진 파일에도 보이듯 이 선거는 근소한 표 차이로 패배한 선거였지만, 내가 맡은 지역에서는 이기기도 했다. 아직도 내게는 선거란 몸과 마음이 쇠하는 힘들고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지만 무섭고도 거룩한 민심을 날 것 그대로 만나는 정말 중요한 기회이기도 하다. 선거, 참 요상한 행사다. 여하간 눈뜨고도 코베이는 세상이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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