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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Aug 24. 2023

저는 도둑놈이 아니랍니다

오래전 어느 날. 회식 후 귀가하던 중 건물 화장실에서 지갑을 발견했다. 어떡할까 고민하다 집 근처의 우체통이 생각났고, 지갑 속을 보는 게 잘못된 행동 같아서 안을 보지 않은 채 우체통에 넣었다(나중에 알았지만 그 지갑 안에는 신분증이 없었던 듯하다). 열흘 정도 지나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형사였다. 그는 지갑 분실 신고가 접수됐고 최초 발견자가 나라면서 경찰 조사에 협조하라고 통보했다. 나는 경찰서에 방문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지만 "결과적으로 지갑이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피의자 신분으로 반복적인 조사를 받아야 했고, 형사는 지갑 주인과 합의를 권했다.


그런데 합의 과정에서 지갑 주인은 외국에서 사 온 비싼 지갑이라며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했다. 브랜드에 통 무관심해서 무슨 상표인지도 몰랐다가 그제야 알아보니 그 지갑은 한정판을 샀더라도 50만 원이 약간 못 되는데 그는 무려 그 6배가 넘는 300만 원을 요구했다. ‘정신적 피해’를 언급하면서.


담당 형사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300만 원은 심했다. 더 얘기해 봐라"라고 귀띔했고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내리누르며 지갑 주인에게 "좋은 일 하려다가 이렇게 됐는데 금액을 적정하게 낮춰 줄 수는 없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격분한 지갑 주인은 나를 아예 죄인 취급하고 '콩밥을 먹이겠다'라는 표현까지 쓰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와 나 사이에는 기이한 갑을관계가 만들어졌다. 일이 복잡해지고 길어지는 게 싫어서 억지로 합의를 했고, 이 일은 경찰에서 검찰로 이송되었고, 나는 점유물이탈횡령죄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간신히 전과자가 되는 건 면했지만 내게 이 일은 일생일대의 치욕적인 일이었다.


점유물이탈횡령죄(형법 제360조)는 대단히 해괴한 법이라 주인을 찾아주려다가도 그게 주인 손에 들어가지 않을 경우 주인을 찾아주려는 행동 자체가 범죄에 해당하여 억울한 상황에 처하는 일이 많다. 무엇보다도 내가 재물을 부당하게 취하려 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입증해야지, 내가 재물을 부당하게 취하려 하지 않았음을 왜 '내가' 입증해야 할까. 어째서 그 입증책임이 나한테 있을까. 법조인들은 타인의 재물을 취하려는 의사가 없었음을 충실히 소명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말이야 참으로 간단하지, 실제로는 그걸 소명하는 지난한 과정에서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받고 심신이 너덜너덜해져야 한다. 그 흉터는 어떻게도 보상받지 못한다.


애초에 이 법의 취지는 잃어버린 금품이 주인을 잘 찾아가게 하려는 거지만 현실에서는 습득자가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리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분실물을 외면하는 분위기가 되는 상황도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의 법은 외국에 보여주기 참으로 부끄러운 법이라고 들었는데, 난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현실성 없는 법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지 않을까.




'코브라 역설'이 생각난다. 인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코브라에 물려 죽자 당국은 코브라를 잡아오면 포상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이렇게 되면 코브라 수가 점점 줄어야 할 텐데 날이 갈수록 코브라를 잡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만 하니 이를 이상하게 여긴 당국에서 은밀히 조사한 결과 코브라를 대량으로 사육해서 포상금을 편법으로 타 가는 이들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코브라 포상금 지급을 중단했고, 몰래 코브라 농장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쓸모 없어진 코브라를 전국의 야산에 대량으로 버려서 코브라 수는 전보다 더 늘고 국고는 국고대로 탕진한 결과만 가져왔다.


코브라 역설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선한 의도로 뭔가를 실시했을 때 그게 반드시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게 내 해석이다.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가 아니니까.


과연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을까

지갑 사건이 있던 바로 그 해의 겨울. 그날은 몹시도 추운 날의 한밤중. 육교 계단을 내려오던 한 분이 얼어서 미끄러운 계단에서 뒤로 넘어져 뒤통수에 큰 충격을 받고 눈이 풀리며 실신을 했고, 나는 그때 육교 계단 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새벽 3시를 조금 넘은 시간에 목격자는 나뿐이었고 그 사람이 그 상태로 방치되면 동사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라 배운 대로 얼른 응급처치를 하고 구급대를 불러 응급실로 옮기도록 했는데, 나는 이 일로 날치기범으로 몰려서 결백을 증명하느라 또 몇 달간 온갖 마음고생을 했던 트라우마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히 남아 있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있었던 지갑 사건의 기억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쌍콤보를 맞아 버리니, 내가 정상적으로 세상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어서 무서웠다.


TV나 인터넷에서 미담을 가끔 듣는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도와주고 조용히 자기 갈 길을 가는 사람. 그저 도울 수 있어서 기쁜 마음 그 하나 말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진정한 의인들. 한량없이 높게만 느껴진다. 그런 분들 덕분에 세상은 지금의 모습 정도나마 유지하는 게 아닐까.


그런 훈훈한 미담을 접하며 "세상에 저런 분이 많았으면 좋겠다"라고 할 자격조차 내겐 없다. 나부터 +1이 되지 못하는데. 바로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세상이 메마르고 각박해지는 건데. 당장 나부터 그렇게 되지 못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내가 세상에 그런 걸 바라겠는가.


경험은 돈을 주고도 못 산다지만 차라리 아니하였더라면 좋았을 경험도 존재한다. 하지만 핑계 대고 싶지 않다. 제대로 된 사람은 "비록 좋지 않은 일을 당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게 옳고, 그런 상황이 다시 생기면 나는 똑같이 할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걸 못하는 내가 소인배이기 때문이다.


브런치 관심작가님께서 심폐소생술 자격증을 따셨다는 기쁜 소식을 포스팅을 통해 알려 주셨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 작가님이 부러웠던 이유는 자격 취득 때문이 아니라, 유사시에 누구든 도와줄 수 있는 분이 되어 기뻐하시는 그 모습 때문이었다. 왜 나는 저렇게 기뻐하지 못할까. 왜 나는 저런 것으로 기쁨을 삼지 못할까.


시간은 아무도 몰래 뭔가를 조용히 삭제해 버리기도 하는데 나는 언제까지 시간의 힘을 믿어야 할까. 시간은 진정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나 역시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꺼이 도우려고 뛰어들 수 있는 사람, 그걸로 기쁨을 삼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부터인지 그 마음을 잃어버린 나 자신이 한없이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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