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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Aug 01. 2023

만물의 근원은 무늬다

6년 전이에요. 직장의 윗선에서 반려견 놀이터 사업을 추진하고 싶어 했고, 상관(이하 P)은 'OO도에 선례가 있다'라며 그 성공사례를 근거로 사업 추진 계획서를 만들라고 지시했지요. 저는 구글 서치를 하고, 담당자를 수소문해서 통화하고, 왕복 4시간 넘는 길을 삘삘 산 넘고 + 삘삘 물 건너 찾아가서 사비로 식사도 대접해 드렸죠. 그래야 조금이라도 알려 주지 모르는 사람이 전화로 이것저것 물으면 얼마나 자세히 알려 줄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P가 알고 있던 거랑은 달랐어요. P가 본 건 그 지자체가 반려견 놀이터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예전 언론 보도가 전부였죠. 해당 지자체 담당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실제로는 그거 한다고 언론에 보도 나가곤 흐지부지해지고 없던 일이 된 거더군요. 모범사례 조사하러 갔던 건데 아무 소득 없었어요. 갈치조림이나 코가 비틀어지도록 먹고 왔죠 뭐.


돌아와서 P께 말씀드렸죠. 이걸 모범사례로 하긴 어렵겠다고. 어떻게 됐을까요? 대박 깨졌어요.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 반까지 장장 6시간이 넘게 깨졌어요. 아니, 깨졌다기보다는 털렸어요. 공대 출신이라서 단순무식한 거냐는 둥, 머리는 장식이냐는 둥(흥, 장식으로 달 거면 작고 예쁜 거 달았죠. 꽃도 붙이고, 핀도 꽂고). 아침부터 초저녁까지 이런 말 듣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아주 그냥 해골이 되도록 털리죠. 제 직장에서 가장 오랜 시간 깨졌던 공식 기록이라도 있다면 분명 저일 걸요. 이럴 때 의지할 것은 오직 무늬연구™뿐이죠(근데 반려견 놀이터를 영어로는 뭐라고 해야 하나요? 저라면 Dog Stage라고 하겠어요).


테이블 무늬에 시선을 집중해요. 이때 눈에 힘은 60%만 줘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요.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아요.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하지 않아요. 나는 아무 생각도... (졸지 않아요!)

무늬는 내 마음이 쉬어 가는 곳

이것이 무늬연구™죠. 그런데 이를 어쩐담요. 그날 하필 테이블이 이렇게(↓) 생긴 거예요. 무늬가 가장 필요했던 상황에서 무늬가 없어 무늬연구™를 못 하는 이놈의 신세. 조금의 무늬라도 있었더라면 그야말로 무늬연구계의 전설을 쓸 수도 있었는데요. 역대 최장시간 무늬연구™로요.

원래 무늬는 그렇게 저의 지친 마음이 쉬어가는 곳이거나, 둘 곳 없는 시선이 은신하는 곳이었죠. 하지만 그럴 때만 무늬를 찾진 않아요. 무늬는 칙칙한 일상을 유채색으로 물들이기도 허죠. 소품으로 방을 장식하는 일, 마음에 드는 시집을 책꽂이에 들여놓는 일, 생업 외에 취미를 가지는 일, 모두가 무늬를 찾아 나서는 일이에요. 그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남들도 크게 다르지 않던데요. 어쩌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무늬를 찾아 헤매며 사는 존재는 아닐까요.


맛에도 무늬가 있어요. 요리하는 사람이 일부를 만들고, 먹는 사람이 나머지를 완성하죠. 무지개색 브런치 세트의 따끈한 빵을 찢어 훈제연어, 아보카도, 구운 양송이와 아스파라거스를 올려놓으며 무늬를 만들어요. 얼음 띄운 녹차에 밥을 말고 시원하게 오이지를 얹는 것도 무늬를 놓는 거죠. 더운밥 위에 통통하고 바삭한 굴비 조각은 어때요. 굴비까지도 아니고 김만 되어도 좋아요. 밥도, 빵도, 먹는 사람이 무늬를 놓도록 만들어졌죠.


글에도 무늬가 있어요. 어떤 글은 시인의 감성, 어떤 글은 재담가의 위트, 또 어떤 글은 식자의 통찰이라는 무늬가 있죠. 어떤 식이든 무늬가 있으면 눈길이 머물러요. 그렇지 않으면 눈은 미끄러지죠. 그렇게 우린 글을 읽으면서도 우리도 모르게 무늬를 찾아요. 그 무늬가 맘에 들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되는 거고요.


모든 작가는 원래 독자였죠. 퍼스널 브랜딩을 하거나 아예 돈을 벌려고 글을 쓰는 경우가 아니면 글쓰기에는 읽고 싶은 욕망과 쓰고 싶은 욕망이 이중으로 겹쳐 있어요. 우린 작가가 세상에 할 말이 있어서 글을 쓴다고 생각하죠. 보통은 그게 맞아요. 하지만 가끔은(사람에 따라선 자주) '읽고 싶은 글'이 있어서 글을 써요. 혹시 이럴 때 없었나요. 뭔가 써 놓고 '내가 그토록 읽고 싶었던 글은 이 글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던 때가요.


먼 훗날 제가 글이 늘어서 누군가가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전 되묻고 싶어요. "먼저 당신은 어떤 글을 읽고 싶으시오?" 만약 읽고 싶은 글이 있는데 누가 이미 써 놓았다면 일단 그 책(글)을 읽겠죠. 그러면 다시 읽고 싶은 책(글)이 생길 텐데, 그걸 또 찾아 읽겠죠. 이것을 계속 반복하면 어느 지점에선 내가 정말 읽고 싶은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글이 있음을 알게 돼요. 나만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글은 거기서 싹이 돋고, 그렇게 읽기와 쓰기가 만나는 지점이 바로 작가가 탄생하는 곳이죠.


그렇게 태어난 작가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무늬가 있는 글을 쓰는 작가, 무늬가 있는 작가니까요.




당신의 무늬가 되고 싶어요.


'좋아요'를 사색해 본 적이 있나요. 글 쓰는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글이 좋아요'예요. 보통은 작가에게 '글이 좋아요'는 '당신이 좋아요'보다 기분 좋은 말이죠. 그런데 누군가가 작가에게 '글이 좋아' 말고 '네가 좋아'라고 말했을 때 그 작가가 더 기쁘다면, 작가에게 그 누군가는 무늬가 되겠죠.


사랑한다는 말을 사색해 본 적이 있나요. 말하는 사람은 그 한마디를 하려고 얼마나 많은 사랑한다를 삼키고 또 삼켰을까요. 넘치는 물 밑에는 물로 가득 찬 항아리가 있듯, 사랑한다는 말 밑에는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이 있어요. 항아리를 넘쳐흐르는 물은 그 항아리의 무늬가 되듯, '너만 사랑해'는 말하는 사람 그 자신의 무늬가 되어요.

항아리에 물이 넘치면, 넘치는 물은 그 항아리의 무늬가 되지요

손글씨를 사색해 본 적이 있나요. 마음에 꾹꾹 눌러쓴 한 장이 나오기까지 쓰는 사람의 내면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요동쳤을까요. 그 한 장을 위해 몇 장의 종이를 찢어야 했을까요. 글씨가 안 예뻐 찢고, 내용이 맘에 안 들어 찢고, 넣고 싶은 말이 나중에 생각나서 찢고. 찢고, 찢고, 찢고... 만약 받는 사람이 그 한 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세상 구경도 못 하고 사라졌을 수많은 것들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탄생한 한 장은 받는 사람 주방의 냉장고, 벽걸이 보드, 화장대 거울의 무늬가 되겠죠.


키스를 사색해 본 적이 있나요. 키스는 그때그때 모두 다르죠. 어떨 땐 맥주거품맛, 어떨 땐 벌꿀에 찍은 족발 껍데기맛, 어떨 땐 딸기치약맛, 어떨 땐 풍선껌맛이죠. 하지만 키스하는 사람 입술은 언제나 하트 모양을 하고 있잖아요. 하트는 심장보단 키스하는 사람의 입술과 더 닮지 않았나요. 키스하는 사람의 입술은 앞에서 봐도 하트, 옆에서 봐도 하트예요. 두 하트는 쏙 들어간 부분끼리 맞닿고, 파인 곳을 채우려고 서로를 끌어당겨요. 그리고 두 사람에겐 그 무늬가 아로새겨지죠.


하트는 원래 무엇의 모양이었을까

사진 찍기를 사색해 본 적이 있나요. 보통은 최대한 많이 찍고 제일 잘 나온 것을 고르죠. 그런데 가끔은 내 눈에 보이는 것을 죄다 찍어서 기억 속에, 영원 속에 무늬를 놓으려고 할 때도 있어요. 그런 생각으로 휴대폰을 몰래 켜서 누군가를 향해 돌렸더니 상대방도 똑같이 나에게 그러고 있었다면, 두 사람의 폰이 마주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무늬가 되는 순간일 거예요.


나는 무늬가 되고, 너도 무늬가 되고

남국의 밤하늘은 하늘 반, 별 반이죠. 하지만 밤하늘의 수많은 별빛들을 합해도 한 사람이 내는 빛만큼 밝지 않다면, 그 밤의 무늬는 바로 그 사람이에요. 별은 흐르고, 별은 눈에 쏟아지고, 별은 어깨를 기대고, 별은 눈을 감아요. 그리고 별은... 무늬가 되어요.




작년에 제 삶에 드리워진 우울의 그림자를 느꼈죠. 때론 압도되기도 하고, 때론 저항하기도 하고, 때론 외면하기도 하고, 때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는 승화를 이루어낼 기회를 얻기도 하고... 참아내며 어렵사리 했던 일들이 하나하나 모여 작년 한 해 저의 무늬가 되었네요.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모습도 저의 무늬고요.


땀내 무성했던 예전을 돌아봐요. 딱히 이룬 건 없지만 나름 열심히는 살았다고 저를 안아 주고 싶네요. 뭔가 잘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저에게 그래 주는 건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 못 할 게 없다는 그런 식의 패기는 어느 때부턴지 간 곳이 없어졌지만, 지금의 나이에 맞는 것을 찾아 삶의 무늬를 계속 채워 나가야 한다는 마음만은 잃지 않고자 해요. 삶은 무늬를 찾아 헤매는 여정이니까요. 나에게, 곁의 사람에게, 그리고 세상에 이런저런 무늬를 그려 가며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으니까요.


삶이 만들어낼 저마다의 무늬가 멈추지 않도록, 오직 저만의 무늬를 완성하기 위해 사색과 성찰이 저의 삶에서 떠나지 않고 영원토록 머물러 주길 바랄 뿐이에요. 마지막으로 만물무늬설을 조심스럽게 주장해요. 만물의 근원은 무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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