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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Sep 16. 2023

'힘내라' '파이팅'은 왜 위로가 되지 못할까

대체 이놈의 위로는 어떻게 하는 걸까. 나에게 가장 힘든 일들 중 하나가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이다. "괜찮아?" 하자니 누가 봐도 안 괜찮다. "괜찮을 거야" 하자니 확신이 없다.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 하자니 솔직히 잘 모른다. 기껏 상상만으로 내가 알면 얼마나 알아. 어쩐지 가식적이고 상대의 마음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 "힘내라"는? 위로할 때 가장 흔한 말이지만 그 말에 힘이 벌떡 났던 사람도 있을까? 이게 위로가 되어 가닿지 못하는 건 이 말의 숨겨진 주어에 '우리(함께)'가 아니라 '너(당신)'만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건 맞지만 대놓고 이 말을 들으면 한없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힘내'는 그야말로 가장 가혹한 명령문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누가 “힘내” 했을 때 나부터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떠올려 보면 누군가에게 “힘내”라고는 차마 못 하겠다('파이팅'도).


이것도 별로, 저것도 별로, 그것도 별로. 내가 위로에 소질이 없는 데다가 머리마저 나쁘니, 이쯤 되면 뭔가를 깨달을 법도 한데 위로가 필요한 사람 앞에서 여전히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힘내긴 개뿔, 그냥 발 닦고 잠이나 자자고

오래전, 토론기법 중 하나인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을 연습하다가 '슈퍼파워 하나를 가질 수 있다면 어느 것을 갖고 싶은가?' 이게 주제였던 적이 있다. 거기서 제일 많았던 건 투명인간 되기였고, 하늘을 날기가 그다음이었다.


그때 나는 ‘남의 사정을 겪어 보지 않고도 그 사람만큼 알고 느끼는 능력'을 말했다가 창의력이 부족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내가 창의력이 빈곤한 것도 그렇게 말한 이유가 맞지만, 실은 그것 말고도 이유가 두 개 더 있다. (1)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그때도 나 자신이 공감 능력이 낮다는 사실에 대해 아쉬움을 크게 느끼고 있었던 듯하고, (2) 이왕 슈퍼파워를 가진다면 인생이 행복해지는 걸 갖고 싶었던 듯하다. 투명인간 되면? 여탕에 마음껏 숨어 들어갈 순 있겠지만 인생이 얼마나 행복해질지는 잘 모르겠다.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어떤 면에선 무지 편하겠지만 어쩐지 너도나도 나한테 온갖 부탁만 할 것 같다. 하지만 남의 사정을 겪어보지 않고도 그 사람만큼 아는 능력이 있다면 정말 매력적인 사람일 테니 어딜 가든 나를 진심으로 반겨 줄 거고 나 자신도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것도 슈퍼파워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누가 자신이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을 당사자와 같은 크기로 알고 느낄 수 있을까? 이건 슈퍼파워가 맞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내가 너무 엉뚱한 대답을 한 건 아니었다고 지금도 굳게 믿는다.




문제는 그게 슈퍼파워에 속한다는 걸 모를 때다. 자기가 아무리 머리가 좋고 인생 경험이 많아도 특정 상황에 대해 당사자만큼 알고 느끼지는 못한다는 그 사실을 잊을 때다. 그게 인간의 능력 밖임을 모르니 자신도 모르게 자꾸 문제해결사가 되려 한다. 누구도 타인의 마음속 문제를 한두 마디 말로 해결해 줄 수는 없는데. 제발 위로가 필요한 친구에게 뭐가 문제인지 재촉하듯 묻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상대방이 힘든 이유가 타당한지 아닌지 평가할 필요도 없는데. 제삼자적 입장에서 잘잘못을 판정하려 할 필요도 없는데. 나 때는 더했다거나 그보다 더 힘든 사람 많다는 말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데.


위로에 통 소질이 없고, 솜씨 좋은 말로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도 없다. 이러니 내가 위로를 청하는 입장일 때 타인에게 무엇을 원했는지 그걸 떠올리는 것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나는 아주 단순하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기억력도 별로 좋지 않다. 그러니 딱 셋만 잊어버리지 않고 살고 싶다.


첫째, 위로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문제해결사가 아니다. 그런데 막상 위로를 해 주는 입장에 서면 이것이 무척 헛갈린다. 그래서 자꾸만 이걸 잊곤 뭔가 자신의 판단을 개입시키려 한다.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하면 어때?' '그렇지만 그건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이런 식으로 뭔가 해결책을 제시하며 조언하려 하거나 상대를 판단하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닫히게 한다. 진짜 위로를 해 주고 싶다면 그 욕구를 참아야 한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때 말고 나중에 상대가 어느 정도 감정적으로 회복되었을 때나 꺼내고 싶다.


둘째, '라떼'와 '나도'는 한 끗 차이다. 하소연하는 사람의 말을 듣다가 나 자신의 경험이 떠오를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나 때는 이랬다, 그땐 더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나 때는 더했으니 너도 금방 해결될 거야, 별 것 아닐 거야' 말하는 사람은 이런 좋은 의도로 말을 해도 정작 내가 위로를 받고 싶은 입장에 서 보니 '난 그 케이스랑은 다른데...' 이게 되어 버리던데. 누구 닮았다는 말이 칭찬의 의도라도 별로 기분 좋지 않은 건 그 말 뒤에 숨은 과잉 일반화 때문이듯, '너만 그런 게 아냐, 나도 그래, 다들 그렇게 살아'에 본능적인 갑갑함을 느끼는 것도 같은 이유다. 공감이 결여된 나도는 라떼와 다른 게 없다.


셋째, 위로에서 핵심은 '함께'이다. 아무리 좋은 말도 그 하나가 빠져 있으면 어떤 위로의 느낌도 받지 못한다. 그가 원하는 건 해결방안을 제시해 주거나 제삼자 입장에서 잘잘못을 판정해 주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상태를 '함께' 해 주는 사람이다.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을까,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아. 거기서 누가 제정신일 수 있겠어. 어려울 때 늘 곁에 있을게,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널 지지해. 이런 말들은 '함께'를 품고 있다. 상대가 힘든 상황을 지나가는 데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다. 어차피 너와 동일한 수준으로 느끼지는 못함을 알고 네가 괜찮아지는 과정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있다. '힘내'나 '파이팅'에는 들어 있지 않은 마음이.

알아? 함께보다 나은 혼자는 없어.

사람들은 말한다. 다들 힘들게 산다고. 나 때는 더했고 나도 그 이상으로 힘들어 봤다고. 다들 그렇게 힘들다면 어떤 말이 힘든 사람에게 가장 힘을 주는지도 잘 알지 않을까. 어설프게 공감하는 시늉 잘못했다가는 힘든 사람의 괴로움을 자칫 과잉일반화해 버릴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지 않을까. 그런데 어째서 그렇지가 않을까. 겪어 본 거랑 아는 거랑은 정말 별개인 걸까.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죽을 만큼 힘들어 본 적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보다는 자신이 힘들던 그때 타인에게 무엇을 가장 바랐는지를 떠올리는 바로 그 역지사지는 아닐까.


사람들은 또 말한다. 너는 쓸데없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게 문제라고. '힘내라'도 안돼, '파이팅'도 안돼, '너만 힘든 거 아니야'도 안돼, '그 정도는 힘든 축에도 못 들어'도 안돼, '다들 그렇게 산다'도 안돼, 그럼 무슨 위로를 할 수 있냐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거냐고. 맞다. 내가 하려는 말이 듣는 사람에게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 확신이 없다면, 난 그럴 때 좋은 방법을 하나 알고 있다. 그냥 안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빨리 천국이 와야 된다. 그래야 위로가 필요한 사람도 없을 테고, 위로 못한다고 머리를 벽에 박아야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고작 이따위 꼴같잖은 주제로 글 쓰면서 말도 더럽게도 많은 나 같은 놈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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