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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May 07. 2024

지금, 그리고 여기

전에 거기가 좋아, 지금 여기가 좋아?

지금 여기.


G는 늘 그런 식이다. 해외여행 도중 숙소를 옮겼을 때도. 새로 알아낸 맛집을 찾아가서 뭔가를 먹었을 때도. 길을 걷다 어디 쑥 들어가서 충동적으로 뭔가를 먹었을 때도.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임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G의 대답은 언제나 '지금 여기'다.


내가 그렇게 물을 때, G는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있지 않다. G에겐 그저 지금 여기가 주는 기쁨 말고는 그 순간 다른 생각이 없을 뿐이다(하지만 기억력은 나보다 훨씬 좋아서 예전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면 거의 나보다 G의 기억이 더 정확하다).


나는 예쁘고 맛있는 곳을 G만큼 많이 알지 못한다. 그 사실이 주는 불안감이 있다. 어쩌다 내 손으로 뭔가를 고르면 전에 갔던 곳보다 못한 곳을 고른 건 아닐까, 어딘가 더 좋은 곳이 있어서 더 잘 알아봐야 했던 건 아닐까, 좋은 곳을 많이 아는 G의 성에 차지 않으면 어쩌나, 이런 걱정들. 하지만 지금 여기가 더 좋다는 G의 한결같은 대답 앞에서 내 그런 걱정은 모두 쓸모없어진다.


그런 G앞에서, 나는 과거의 것을 더 좋아할 수가 없어진다. 선택하지 않은 것에 미련을 가질 수도 없어진다. 자동으로 나에게도 지금 여기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게 된다. G가 가장 좋아하는 게 곧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니까. G가 좋아하는 그 대상도 대상이지만 그보다도 G가 뭔가를 좋아하는 그 행위와 상황 자체야말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니까.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다가 어떤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다. 내겐 공부는 늘 힘들다(그렇다고 울거나 한 건 아니고, 가끔 눈으로 땀은 흘렸다). 공부로 인한 고통은 결국 공부로밖에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도 그게 공부 자체에 따라붙는 고통의 기본값마저 삭제하진 못한다. 어떤 사람은 목표가 뚜렷하면 공부가 힘들지 않고 재밌어진다고 말하지만 그건 상상으로 외치는 정언명령이고, 산 정상에 오르겠다는 결심이 뚜렷하다고 등반이 힘들지 않은 게 되지 않듯 목표가 확고하다고 공부가 힘들지 않은 게 되진 않는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그런 고통 말고, 그때 내가 하나 크게 잘못한 게 있다.


우리는 과거/현재/미래로 시간을 나누지만 사람이 실제로 뭔가를 겪고 느낄 수 있는 건 오로지 현재뿐이다. 끊임없이 지금, 지금, 또 지금을 경험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 무수한 지금이 모여 일상이 되고 삶이 될 뿐이다. 너무 맛있어서 기절할 것 같은 음식의 맛을 혀가 느낄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고, 육체와 영혼이 1cm 분리되었다가 합쳐지는 키스의 몽롱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다. 그 지금을 제외한 모든 순간은 그저 사람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때 내가 받았던 고통은 대부분 내 상상이 만들어낸 고통이었다. '공부할 것이 많다' '마음껏 잠을 잘 수 없다' '취미 생활을 할 수 없어 삶에 재미가 없다' 여기까지가 당시의 현재에 실재하는 괴로움이었다. 그걸 가지고 '내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 '이것도 못해서 뭐는 제대로 한담' '내 인생은 대체 왜 이 모양이람'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되면 어쩌지' '이러고서 그날 실력발휘 못하면 어쩌지'... 내 마음이 써낸 스토리에서 이 모든 생각은 볼록렌즈를 통과한 햇빛처럼 신기하게도 늘 같은 지점, 절망감으로 모아졌다.

(그게 자아성찰이냐, 자아고문이지)

나는 고질적으로 창의성이 부족하지만, 이때만은 그야말로 괴력에 가까운 창의력을 폭렬시켰다. 과거의 고통을 회상하고 미래의 고통을 상상해서 엄청난 크기의 스토리를 만들어 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스토리를 써 놓고 그 안에 쏙 들어가 찍 깔렸다.


무척 힘들 것만 같고 두렵던 일이 막상 닥치면 어찌어찌 견뎌지듯, 잔뜩 기대하고 찾아간 곳이 막상 가 보니 생각만 못하듯, 사람이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일은 그가 상상하는 기대, 그리고 그가 상상하는 고통 사이 어디쯤에 위치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실제로 존재했던 고통에 나의 과거, 나의 미래라는 이름으로 쓰인 스토리를 꾸덕꾸덕 뭉쳐 놓으면서 내가 직면한 고통의 실제 크기를 보지 못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해야 할 공부가 많다는 상황 자체가 고통이지만 '지금 그리고 여기'에 머물렀다면 그렇게 매일매일 절망감에 잡아먹히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수험생활도 좀 더 잘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비록 그 기간이 나쁘게 끝나진 않았지만, 이 하나는 내가 아주 잘못했던 일이다. 사람은 오랫동안 뭔가를 목표로 고생하다가 결과 하나만 좋으면 그 기간을 통째로 성공으로 기억하고 그 기간 잘못한 것들은 싹 잊고 넘어갈 때가 있다. 그리고는 삶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서 그 잘못을 고스란히 되풀이한다.


하지만 수험생활 하나에 한정해서 말하더라도, 그 결과가 불합격이든 합격이든 심지어 아예 전국 최고득점자이든 '지금 여기'를 잊었던 때가 그 사람에게 있었다면 그건 꼭 되짚어 볼 일이다. 누구의 삶도 거기서 끝나지 않으니까. 삶은 바로 다음 장부터 새로 쓰일 테니까.


지나간 과거도, 오지 않은 미래도, 실제 겪고 있는 '지금 여기'를 빼면 환상일 뿐이다. 과거도 전에는 지금 여기였고 미래도 나중에는 지금 여기가 되니, 나는 항상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살고 존재하는 지금 여기 대신 마음속 환상이나 다름없는 과거와 미래로 한없이 마음이 뻗쳐가고 거기서 살았다. 몸뚱이만 지금 여기에 놓아두고 마음은 상상의 세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뒤에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오랫동안 몰랐다. 과거와 미래라는 이름으로 이 순간 존재하지도 않는 고통을 현재로 가져와서 나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집대성해 놓고는 나 스스로 뛰어들어가 깔리고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바다를 건넜던 항해술은 '지금 그리고 여기' 였음을 나는 알지 못했다. 언제나 지금 여기를 사는 G를 훗날 알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도 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에 거기가 좋아, 지금 여기가 좋아?

지금 여기.


단순하고 우아한 G의 대답에서 삶의 태도를 사색한다. G와 함께일 때 나는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 어떤 과거나 어떤 미래보다 생생하고 강렬한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 그런 G와는 어디에 가든, 무엇을 보든, 무엇을 먹든, 다 최고의 순간이 된다.


내가 살아온 방식을 생각해 본다. 지금보다 한 걸음 더 전진하고 한 걸음 올라가려고 나에게 뭔가를 더하고 또 더하며 항상 미래를 응시하는 그간의 태도에 얼마나 우월한 가치가 내재된 건지 잘 모르겠다. 지금 쳐다보는 미래도 언젠간 지금 여기가 되겠지만 그때가 되면 지금과는 또 다른 미래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지금의 생각을 내가 딛고 선 곳에 말뚝처럼 푹 박아서 현재에 나를 심는다면 최소한 지금보다는 삶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삶에서 참고 이겨내야 할 일이 혹시 또 찾아오더라도 예전의 그때처럼 나도 모르게 쓴 스토리에 질식해서 부정적 사고의 악순환에 빠지진 않게 되지 않을까.


그런 지평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있다면, 더하기 말고 빼기를 하면서 지금 여기에 온전히 몰입하는 일일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젠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서 지금을 살 때 G만큼 나를 훌륭하게 이끌어줄 수 있는 길잡이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또 그렇게 될 때 오래전 '지금 그리고 여기'를 살지 못하며 하루하루를 좌절감과 절망감에 빠져 보냈던 한 어리석은 수험생의 아까운 시간도 이제와서 뒤늦게나마 조금은 가치 있었던 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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