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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Sep 11. 2024

악필로 살아간다는 건

괴로웠지만 이젠 괜찮아요 :)

지렁이 그림이 아니다. 암호도, 상형문자도 아니다. 분명 한글을, 그것도 내 손으로 썼는데 알아볼 수 없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급하게 써서 그런 거면 몰라도 심혈을 기울여 천천히 썼는데도 엉망이면 그야말로 고역이다. 악필이여, 너는 내 운명인가.


사람들은 자주 내 글씨에 대해 말했다. 10살 때는 연필 쥐는 자세가 잘못되었다고 뒤에서 빗자루로 '딱' 하는 타음이 옆 반까지 들리도록 머리를 맞은 적이 있고(옆 반 친구 말로는 웬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나 했다고...), 집에서는 발가락으로 써도 이보단 낫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동네에 서예의 대가가 사셔서 한번은 어머니가 그분께 나를 데려가서 "우리 애가 글씨를 못써서..."라고 한 일이 있었는데 '아, 나는 글씨를 못 쓰는 애구나' 싶어 글씨 쓰기가 더 싫어졌다.


"ㄱ이 꺾이는 게 왜 이래?" "ㄴ이 날아갈 것 같네" "ㄷ의 끝이 왜 이렇게 올라가?" "ㅁ이 찌그러졌네" "ㅂ은 그렇게 쓰는 게 아냐" "ㅅ이 옆으로 넘어지려 하잖아" "너는 ㅇ이 너무 작아" "모음이 획이 풀풀 날리잖아" "필압이 일정하지 못해" "남자 글씨가 획이 좀 힘차게 쭉쭉 뻗어야지"

아예 낙인이 찍혀 버리면 더욱 이런 상황이 된다

이런 말을 들을수록 나는 손글씨를 남들에게 보여주는 게 싫어졌다. 혼자이길 좋아하는 성격이 되었던 데는 글씨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한다. 글씨를 쓰는 동안에는 한 손으로 가리고 쓰는 버릇이 생겼고, 노트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필기나 메모도 거의 하지 않았다(남들은 게을러서 그런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글씨는 사람의 인격이다!' 정설과도 같은 이 말은 어쩐지 "넌 글씨가 별로니 인격도 별로겠네?"처럼 들렸고, 글씨가 학업성적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은 "너는 아마 공부도 못했겠네?"처럼 들려서 썩 유쾌하지 못했다.


워드 프로세서를 쓰면서 오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요즘은 과제물 제출, 문예대회 출품, 직장의 보고서 등 웬만한 문서 작업은 컴퓨터가 다 한다. 하지만 시험, 취업, 고백, 연애 등 인생의 결정적 분기점에는 손글씨로 치러내야 하는 일이 떡 버티고 있다. 첨단 디지털 기술도 해결해 주지 못한 악필의 비애. 그게 ‘비애’란 사실을 알아주는 이 없어 더 괴롭다.


어쩌다 손편지 쓰기 같은 순간이 오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필적 교정이라도 받을 걸. 이제는 누가 "넌 글씨가 왜 그래?" 하더라도 "그러게요, 저는 애써도 안되네요" 하며 가볍게 웃어넘길 자신이 있으니 나는 악필로 살아가는 삶을 의연하게 받아들인 줄 알았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글씨 쓰기로 무수히 지적받고 위축된 열 살짜리 아이가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누군가의 생일 카드를 썼다. 여전히 내 글씨는 부끄럽다. 틈틈이 노력했지만 아직도 성과는 없다. 내 딴에는 노력했다 해도 객관적으로 충분한 노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겠지만 어쩐지 암만 노력해도 잘 쓰지 못할 것 같다. 나중에는 좀 나아져서 그럭저럭 읽어 줄 만한 글씨 정도는 될지 모르지만 그때도 잘 쓴다는 소리까진 못 들을 가능성이 크다. 노력의 결과가 눈에 띄는 수준으로 나타나는 게 나는 대체로 더딘 편이라서.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 글씨를 쓸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온 힘을 다해 카드를 눌러쓰고 찢기를 반복하던 그날 밤, 오랫동안 구석에 밀어두곤 회피하고 싶던 나의 결점을 꺼내어 정면으로 마주하는 묘한 즐거움을 알게 되었으니까. 잘하지 못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을 때 느끼는 그 정체 모를 심리적 부유함이 이유 없이 좋았다. 나의 글씨를 평가하는 수많은 선생님들이 내 삶에서 모두 사라진 지금, 비로소 나는 내 글씨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카드를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내 글씨가 제일 좋단다. 나한테 늘 귀엽다고 말하는 그는 어쩌면 종이 앞에 쪼그리고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귀여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쓰면서 육수를 줄줄 빼는 한결같은 모습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펜을 너무 세게 잡아서 그 짧은 말을 쓰는 데도 손목과 어깨가 저렸음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이 한 장을 쓰느라 몇 장을 찢었을지를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어색한 몇 글자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을 보아 주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제일 좋은 글씨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생각이 맞다면 못써서 더 사랑스러운 글씨였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곁을 내주지 않는 사람들의 지적 때문에 손글씨 쓰기를 두려워하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지 생각한다. 인자한 어르신의 투박한 자필, 세상의 맑은 소리를 받아 적은 어린이의 편지, 한밤중의 고요함 속에서 길어 올린 시. 그걸 보는 건 바로 글씨를 쓴 사람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니 악필이라도 그럭저럭 살 만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글씨체 말고 마음을 읽을 테니까. 이젠 누가 나에게 "글씨를 못쓰시네요"라고 말한다 해도 "전 괜찮습니다. 이런 제 글씨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요."라고 말할 수 있으니, 그것 하나로 되었다.


손글씨로 빼곡히 채운 편지를 쓰고 싶은 밤이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은 밤이다. 가장 아끼는 펜을 꺼내 들고 싶은 밤이 오늘 또 왔다.



더 쓸 수 없다. 마음에 남은 말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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